한국일보

‘이 손들’

2020-05-12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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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를 처음 만지는 손/ 당신 이마의 열을 재고/ 맥박을 세고/ 당신의 침상을 만들어주는 손이/ 이 손들이다.

당신의 등을 두드려주고/ 피부 반응을 살피고/ 팔을 잡아주고/ 쓰레기통을 밀고가고/ 전구를 갈고/ 수액량을 고정시키고/ 유리 물병의 물을 부어주고/ 엉덩이를 바꿔주는 손이/ 이 손들이다. (중략)

소변줄 새는 걸 바로잡아주고/ 침상 변기를 비워주고/ 기도에 삽입한 관을 소독해주고/ 산소통을 옮겨주고/ 수술할 때 압박집게로 동맥을 움켜쥐고/ 깁스를 만들고/ 고통완화제 복용량을 기록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를 만지는 손이/ 이 손들이다.


동화 ‘곰 사냥을 떠나자’로 유명한 영국의 계관 아동문학가이자 시인 마이클 로젠이 쓴 시 ‘이 손들’(These Are the Hands, 류시화 번역)이다. 간호사들의 세심하고 따뜻하며 전문적인 손길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시는 영국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의 창립 60주년기념 앤솔로지의 표제작이다.

그 시인 마이클 로젠(73)이 지난 3월말 코비드-19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으며 지금도 위중한 상태라고 최근 영국의 뉴스들이 보도했다. ICU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가 ‘이 손들’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고 하루 빨리 쾌유하기를 빈다.

오늘, 5월12일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의 탄생 200주년 기념일이자 그의 생일을 기념해 제정된 ‘국제간호사의 날’이다. 나이팅게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으나, 놀라운 열정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현대 간호체계의 기틀을 확립한 개척자였다는 점에서 의료계가 혼란에 빠진 이 시기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인물이다.

나이팅게일의 가장 큰 업적은 ‘병원 위생’의 확립이다. 그런 기본적인 일이 무슨 업적인가, 한다면 19세기 유럽의 병원들은 쥐가 들끓고 하수구가 넘치는 지저분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부자와 귀족들은 주치의를 두고 왕진치료를 받았고, 병원은 돈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나 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의 간호사는 잡일과 청소, 잔심부름이나 하는 하급의 노동자였고 교육수준도 낮아서 전문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니 영국 상류층 명문가의 막내딸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가 어떠했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를 막기 위해 여러번 혼사를 추진했고 상당한 미인이어서 구혼자도 많았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의료계에 헌신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이웃과 병들고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 나이팅게일은 독일에서 간호학 공부를 마친 후 크림전쟁(1853~1856년) 야전병원에서 초인적인 활약을 펼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당시 전쟁에서는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열악한 위생여건에서 부상당한 상처가 감염되거나 콜레라, 파상풍 등 전염병이 돌아서 사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나이팅게일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하고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우기 시작했다. ‘손 씻기’를 처음 도입했고, 밀집한 병상 사이에 ‘거리두기’를 시행했으며, 상태가 중한 환자를 격리하는 집중치료실(ICU) 개념을 처음 제안한 것이 모두 그녀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모자란 의약품 지원을 얻기 위해 사망자 비율과 위생의 연관관계를 통계도표로 만들어 제시함으로써 결국 지원을 받아냈고, 이후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이 42%에서 2%로 감소하는 놀라운 효과를 보게 된다.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돌아다닌 이미지 때문에 언론을 통해 ‘등불을 든 여인’이란 애칭으로 불린 나이팅게일은 실제로는 유능한 행정가요 협상가였다고 전해진다. 배짱 좋고 고집 세고 명문가 출신인 그녀가 단호히 개혁의 칼날을 휘두른 덕분에 전근대적 의료행정이 크게 개선되었다는 평가다. 그는 또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다수의 간호 전문서적을 저술해 현대의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자료를 세웠으며, 지금도 세계의 모든 간호학교에서 학생들은 ‘나이팅게일 선서’를 하고 있다.

지난 주 LA의 한 대형병원에서 N95 마스크 없이 코비드-19 응급환자를 돌본 수간호사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했다고 LA타임스가 보도했다. 병원위생을 위해 투사처럼 싸웠던 나이팅게일이 21세기 병원에서 의료진들이 마스크나 보호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두려움에 떨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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