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희망의 싹

2020-05-12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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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말 미국 경제는 대공황 이후 최악이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로 인플레는 두 자리 수로 치솟은 뒤 좀처럼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인플레가 오르면 실업률은 내려간다는 통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실업률까지 두 자리로 치솟았다. 경기 침체(stagnation)와 인플레를 합친 ‘스태그플레이션’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도 그 때였다.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연방 준비제도이사회(FRB)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1981년 연방 금리를 사상 유례없는 21%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그와 함께 미국 경제는 극심한 침체에 빠졌다. 이미 1980년 불황에 신음하던 경기는 1982년 다시 2차 불황에 진입했다. 실업률은 대공황 이후 경험해보지 못한 11%에 육박했고 인플레는 1980년 사상 최고인 14.8%를 기록했다.

그러나 FRB가 돈 줄을 죄면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인플레는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81년부터 하락세를 보이던 인플레는 1983년에는 마침내 3% 이하로 떨어졌다. 미국은 그 후 40년 동안 높은 인플레를 경험한 적이 없다.


인플레가 잡히면서 경기 회복의 발판은 마련됐지만 실물 경제의 회복은 더뎠다. 사람들은 길고도 길었던 고 인플레와 불황의 여파로 기진해있었다. 경기의 흐름이 변했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주식 시장이었다. 1982년 777로 바닥을 친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그 해 20%나 올랐다. 그 다음 해인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은 장장 7년에 걸친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이처럼 실물 경제보다 경기 흐름을 먼저 파악하는 주식 시장의 특성 때문에 주가는 중요한 경기 예측 지수의 하나다. 투자가들은 항상 현재 상황보다 6개월이나 1년 뒤를 전망하며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말 하이텍 광풍이 불 때나 2000년대 중반 ‘거짓말쟁이 론’을 기초로 한 주택 버블이 부풀 때는 오히려 오르는 주식은 다가올 경기 침체의 전조였다.

지난 8일 미국 실업률은 14.7%를 기록하며 대공황 이후 최악을 기록했다. 3월 중순부터 매주 수백만명씩 실업자가 발생했으니 놀랄 일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다. 다우존스 산업 지수는 8일 1.9% 오른 24,331로 장을 마감했다.

고용이 역대급 최악인 상황에서 주가가 올랐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투자가들은 16%가 넘는 실업률을 예상했는데 실제 수치가 이보다 낮아 오히려 이들을 안심시켰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총 실직자 수도 2,050만으로, 예상된 2,200만보다 적었다고 한다. 이날 부로 미국 대다수 주가 부분적이나마 일부 업종의 영업 재개를 허용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미 주가 상승은 지난주만의 일은 아니다. 다우존스 산업 지수는 최고치에서 40% 하락하며 바닥을 친 3월23일 이후 지난 한 달여 동안 30%나 올랐다. 지난 수십년 간 찾아보기 힘든 빠른 회복세다.

오르고 있는 것은 주식만이 아니다. 지난 4월 말 한 때 마이너스까지 떨어졌던 유가는 지난 열흘 사이 두배로 올라 현재 배럴 당 24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주요 제품의 원자재로 쓰여 ‘경기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구리 값도 상승중이다. 5월 인도분 구리 값은 지난 주 파운드 당 2달러40센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3월말 최저치에서 14%가 오른 것이다.

반면 주식 시장의 변동성을 보여주는 CBOE 변동성 지수는 11일 27.57로 지난 2월 말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시장의 등락 변동성을 재는 이 지수는 코로나로 인한 불안감이 최고에 달했던 3월 중순에는 사상 최고인 80선을 돌파했다. 이 지수가 높으면 투자가들이 미래를 불안하게, 낮으면 안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일련의 지표들은 시장과 투자가들이 현 상황은 나쁘지만 미 경제는 이미 바닥을 쳤으며 앞으로는 개선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단 주식도, 유가도, 구리 값도 연초 수준이 아니라 하락폭의 절반 정도만 회복하고 있다는 것은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릴 것임을 시사한다.

이번 경기 침체와 회복 모습은 V자도 U자도 아니고 급속히 내려갔다 서서히 올라가는 나이키 로고를 닮을 것이란 분석이 유력해 보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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