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 줄지어 서있는 날씬한 팜트리의 연초록 잎들이 봄바람을 맞아 하늘거린다. 2020년 봄은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만 박혀있는지 벌써 두 달째다.
지루함을 면하려고 컴퓨터 자판을 토닥거리는데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 언뜻 ‘사우스 코리아’란 말이 들린다. 또 무슨 북한 뉴스인가 싶어 얼른 거실로 나가보니 “대한민국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한국이 효율적인 코비드-19 진단기술, 감염자 추적, 투명한 정보 공개, 양호한 의료체계, 전국민 보험제도와 사재기 없는 뛰어난 시민의식으로 팬데믹 시련을 잘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4.15 총선거를 두고도 칭찬 일색이다. 방역조치가 철저히 취해진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총선을 치른 것도 경이로운 민주국가의 정치 행위라고 부러워한다. 그뿐인가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조차 한국의 코비드-19 진단 키트를 수입하려고 야단들이라는 것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한국인의 집단적 자부심을 드높인 새로운 브랜드 탄생이다. 분명 ‘메이드 인 코리아’인 것이다.
70년대 초 나의 첫 해외 주재근무지 미국, 수퍼마켓이나 백화점에서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KAL기에서 내려오는 한인 조종사를 보고 “한국인도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다니 놀랍다”라는 미국인들이었으니 한국산이 환영받을 리 있겠는가. 분노를 억누르고 한국을 알리는 책자와 브로셔를 들고 관광업계를 찾기도 했고, 한국에 대한 홍보 영상 모임을 위해 여러 도시를 찾아다녔다.
70년대 말, 일본에서 파리로 전근되었다. 파리 한국대사관은 정기적으로 한국 지상사 수출진흥회의를 주최하였다. 수출쿼터 달성여부를 점검하고, 관련 애로 및 건의사항을 종합하여 본국에 보고하는 회의였다. 조잡한 품질개선 없어도 ‘가격만 싸면 경쟁할 수 있다’든가, 소량주문은 외면하고 ‘다량주문만 받겠다’는 한국 수출업계를 향한 불평은 회의 때마다 되풀이되었다. 당시 수출은 전쟁에 비유되었다. 군대용어로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식의 자조적인 탄식도 나왔다. 본국의 일방적인 명령과 일확천금의 탐욕은 척후병을 총칼 없이 최일선으로 내보내는 것과 같았다.
수출 진흥책으로 외교관, 지상사직원과 가족들만이라도 물건 사러갈 때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찾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본국에서 방문한 VIP를 ‘루이뷔통’ 등 파리의 명품점으로 안내해야하는 자가당착도 감당해야했다.
그 수출 회의는 나에게 상표를 유심히 보는 버릇을 갖게 해주었다. 일부러 이 물건 저 물건을 뒤적이다가 어쩌다 메이드인코리아 제품을 발견하면 내 혈육이라도 만난 것 같이 반가웠고, 한국제품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을 보면 사나 안사나 확인하느라 주변을 서성거렸다.
스위스에 부임하고 나서 스키장비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한국의 코오롱 제품을 찾았으나 없다는 것이었다. 매니저를 만나 코오롱 본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코오롱 스키장비를 살 수 있었다. 사실 몇 번 쓰지도 못해 새것이나 다름없는 그 장비를 전근 발령이 나 LA로 떠날 때 스위스인 직원에게 주었다. 무척 좋아하던 그 친구는 그해 겨울 내게 전화로 한국제 스키장비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고맙다며 ‘당케 쉔’을 힘주어 말했고, 나도 기뻐서 ‘비테 쉔’으로 응수했다.
미국시민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국산’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여전히 메이드인코리아를 의미하는 것이다. 상표에서 ‘메이드인코리아’를 확인하는 버릇도 그대로이다. 내가 타는 차도 현대 SUV이다.
광복 75년을 맞은 한국은 빈국에서 세계 12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 기간산업 못지않게 K-팝, K-드라마로 많은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초현대 고층건물, 상점과 백화점, 아파트, 각종 위락시설이 화려한데다 최첨단 기능까지 갖춰 최고의 편의성을 제공하고 있는 한국의 생활수준은 미국에 절대 뒤지지 않아 보인다.
이 경이로운 선진 조국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드인코리아’를 팔기 위해 밤을 지새웠던 젊은 세일즈맨들, 그 메이드인코리아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청춘을 바쳤던 소위 공순이 공돌이들. 그들도 깃발 들고 앞장선 지도자와 동등하게 우리가 마땅히 기억하고 존중해야 할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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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운 리버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