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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선진국 이야기

2020-05-05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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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HD TV가 일반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두 번 놀랐다. 첫번째는 기존 TV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뛰어난 화질이고 두번째는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청난 가격에 놀랐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지금 가전제품 가게에 가본다면 다시 한번 놀랄 것이다. 화질은 그때보다 훨씬 좋아졌는데 가격은 거저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TV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70년대 VHS가 처음 나왔을 때는 특권층만 살 수 있는 고가품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량생산에 들어가면서 가격은 낮아지고 이것이 다시 수요를 불러일으키는 선순환이 계속되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필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VHS는 DVD에 밀리고, DVD는 블루레이에 밀리다가 이제는 블루레이조차 스트리밍에 밀려 자취를 감출 처지에 놓였다.

이런 가전제품들의 탄생과 소멸 사이클은 기술 혁신의 작동 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회사든 신기술을 개발해 이를 상용화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그러나 제품 생산에 성공하더라도 이것이 수익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자사 제품보다 더 좋은 기술을 이용한 신제품이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VHS의 경쟁자였던 베타맥스나 블루레이와 한판 싸움을 벌였던 HD DVD는 투자금을 한 푼도 못 건지고 퇴출되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과 함께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한국은 전국민 의료보험을 바탕으로 값싸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는데 미국의 국민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비싼 약값과 치료비를 대느라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전국민 의료보험이 없고 의료비가 비싼 것은 사실이며 이는 개선돼야할 사항이다. 그러나 미국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한국이 누리고 있는 첨단 의료기법과 신약의 상당수는 미국에서 개발된 것이란 점이다. 심장질환 예방에 중요한 콜레스트롤 저감제인 스타틴 계열 약품을 비롯, 스텐트 시술과 바이패스, 페이스메이커 등이 모두 미국이 만든 것이다.

미국이 신약과 신기술 개발의 리더가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하나는 탄탄한 기초 의학이다. 1969년부터 2008년까지 노벨 의학상을 탄 미국인 수는 57명인 반면 유럽과 일본, 캐나다와 호주를 합쳐도 40명밖에 안 된다. 거기다 의료 신기술 개발에 대한 대대적 국가적 지원이 있다. 국립의료원(NIH) 하나의 1년 예산이 300억달러로 유럽 유사 단체의 10배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신기술 투자에 대한 수익이 보장된다. 사실상 국가가 유일한 의료 구매자인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 결과 미국은 노벨수상자뿐만 아니라 의료 혁신 분야에서도 타국을 압도한다. 2001년 스탠포드대 빅터 푹스 교수와 다트머스대 해럴드 삭스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75년부터 2000년까지 이루어진 10대 의료기술 혁신 가운데 미국은 유럽을 2대1의 비율로 리드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지난 주 코로나 바이러스 치료제로 렘데시비르의 사용을 긴급 승인했다. 이 약을 사용하면 치유 기간을 4일 정도 단축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 약은 원래 길리어드사가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용으로 개발한 것인데 별 효과를 보지 못해 사장될 위기에 놓였다 코로나 치료제로 인정받으면서 극적으로 살아나게 됐다.

이상 세계에서는 모든 의학자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신약 개발에 몰두하고 완성된 제품은 무료로 필요한 사람에 나눠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신약 개발은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고 성공하더라도 개발과 임상실험을 거쳐 당국의 승인을 받는데 오랜 시간과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투자 이익에 대한 보장이 없이 이런 일에 뛰어들 회사는 없다. 첫 코로나 치료제가 미국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처음 비쌌던 약과 기술도 시간이 흘러 이용자가 많아지면 가격은 내려가고 그렇게 되면 그 혜택은 한국과 같은 다른 나라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의료 선진국에 대한 자부심도 좋지만 신약과 의료 기술을 개발해 많은 목숨을 구한 나라에 대해 약간의 감사의 마음도 필요할 듯싶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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