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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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 그리워

2020-04-29 (수) 문성길 /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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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생각하며

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필수적인 식료품, 약품 구입 등 몇몇 사항 외에는 바깥 출입자제령이 내려진 지가 꽤 오래되어, 이를 충실히 따르다보니 인내도 거의 한계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또한 건강유지를 위해서 외출 자제령 실시후부터 곧바로 시작 한 트레드밀(Treadmill) 운동기구 위에서 거의 매일 30분 뛰고난 후 몸을 씻고 나면 몸과 기분이 한결 가뿐해진다. 운동기구는 워싱턴에서 캘리포니아로 4년 전 이사올 때 이삿짐 속에 애지중지 챙겨왔는데 집이 협소해 집안에는 못들이고, 차고의 반을 스토리지로 사용, 그곳에 운동기구를 놓아두었고 집사람이 간혹 이용해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거의 매일 사용하다시피 한다. 예전 워싱턴에 살 땐 이런 일화도 있다. 새해를 맞이하면 누구나 한번쯤 새해결심을 하는 데 얼마 가지 않아 이유야 어떻든 흐지부지 되어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우리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운동을 포함 집밖의 거의 모든 활동이 제약 내지 금지된 상태의 요즈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처럼 그동안 천덕꾸러기나 다름없었던 이 운동기구는 우리 부부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의 매일 운동을 하고 있지만 차고(차고문을 활짝 열어놓지만)에서 하니 햇빛이 그리워진다.
오늘 따라 햇빛이 화창해 운동 끝나고 땀 흘린 몸의 목욕을 좀 미루고 얼마 전 워싱턴에 계신 대학 대선배님인 변만식 선생이 보내주신 그 분의 저서 ‘윤동주 시인 영문번역시집’을 집어들고 쬐그마한 뒤뜰로 나갔다. 짧은 운동복을 입은 내 온몸을 어루만지듯 햇볕이 강렬히 스며든다. 또한 고요하기 그지 없어 적막하기까지 하다.

한편으론 11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멀쩡한 헤드폰으로 I-팟에 입력된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눈으론 윤동주가 마지막 남긴 시 ‘봄’을 비롯 정지용의 ‘향수’,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주옥같은 시들을 감상한다. 손은 놀릴 수가 없어 손수 내가 튀긴 팝콘을 한주먹씩 집어 입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변 선생님의 시 번역실력은 대단하시다. 시 자체도 참 오묘한데 그걸 어찌 그리 섬세하게도 원작자의 속마음을 훔친 듯 영어로 훌륭히 표현해 내셨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아까운 28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에서 옥사한 윤동주 님이 인연이 되어 변만식 작가님, 그리고 민병희 교수님과 시집을 통해 만난 행운은 아마도 워싱턴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그립고 만나고 싶은 분들이 너무나 많은 인재의 보고(寶庫), 워싱턴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문성길 /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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