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석유의 사망’?

2020-04-2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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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는 17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영국의 권위 있는 경제 전문지다. 이 잡지가 2000년 표지를 ‘금의 사망’이라는 기사로 장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플레가 한창이던 1980년 온스 당 800달러를 넘었던 금은 그 후 20년 동안 하락에 하락을 거듭하다 2000년에는 300달러 이하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명목상으로만 2/3가 떨어졌고 인플레를 감안한 실질 하락률은 90%에 이르렀다. 모든 투자 종목 중 최하위 성적이었다.

그 사이 주식은 엄청나게 올랐다. 1982년 777을 기록했던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2000년 1만1,000을 넘었다. 14배가 오른 셈이다. 그 정도는 약과였다. 90년대 말 하이텍 붐을 타고 일부 기술주들은 수십배에서 수백배까지 치솟았다. ‘금의 사망’이란 말이 나올 만했다.

그러나 그 기사가 나온 후 하이텍 버블이 터지면서 주가는 폭락하고 금값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6년 미 주택가가 정점을 치고 2008년 금융 위기가 찾아오면서 금값은 2011년 온스 당 1,800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3,000달러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으며 2016년에는 1,000달러대까지 추락했다.


요즘 20년 전 금과 비슷한 물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석유가 아닐까. 지난 주 선물 시장에서 유가는 배럴 당 마이너스 37달러를 기록했다. 석유를 사는 사람에게 배럴 당 37달러를 얹어주겠다는 이야기다. 석유가 시장에서 거래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곧 다시 플러스 대를 회복했지만 27일 현재 석유가의 기준이 되는 6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는 전날에 비해 25% 하락한 12달러78센트를 기록했다. 올 초 60달러에서 80%, 금융 위기가 한창이던 2011년 120달러에서 90%가 하락한 수치다. 지난 10년간 최악의 투자가 석유라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항공 운송업계가 직격탄을 맞은 데다 재택근무와 직장 폐쇄가 늘면서 휘발유 수요가 크게 줄어 넘치는 석유를 보관해둘 데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생산량 조절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2008년부터 시작된 소위 ‘프래킹 혁명’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람도 많다. 물과 모래, 화학약품을 고압으로 분사해 암반에 들어있는 석유와 천연 개스를 추출하는 이 기법은 만년 석유 최대 수입국이던 미국을 석유 수출국으로 바꿔놓았다. 2008년 하루 500만 배럴 하던 미 석유 생산량은 증가에 증가를 거듭, 2018년 1,000배럴을 돌파하며 사우디와 러시아를 제치고 미국을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으로 만들어줬다. 세계가 석유로 넘쳐나던 최악의 시점에 코로나 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처럼 유가가 폭락하자 반등을 기대하며 석유 상품에 투자가들이 몰려들고 있다. 한국 거래소에 따르면 소비자 경보 발령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일부터 24일 사이 유가 상장 지수 펀드(ETN, ETF)에 개인이 1조4,0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쏟아부었다. 이 중에는 오를 때는 2배로 오르지만 떨어질 때 역시 2배로 떨어지는 레버리지 상품도 포함돼있다. 거기다 투자가들이 몰리면서 상품 내재 가치와 시장 거래 가격의 차이인 괴리율이 1,000%에 달하는 상품까지 나왔다. 극히 위험한 투자 행태다.

원유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10달러대가 유지되면 금년 말까지 6,000여 원유 생산업체의 70%가 파산 위기에 놓이고 내년 말까지 미국내 석유회사 1,000곳 이상이 파산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석유 생산은 줄어들 것이고 그 때쯤 세계 경제가 코로나 사태를 벗어나 회복 단계에 접어들면 석유 수요는 늘게 된다.

석유는 교통수단의 90%가 의존하고 에너지 생산의 40%를 차지할 뿐 아니라 비료, 플라스틱, 화장품 등 생필품의 원료로 향후 수십년간 대체 불가능한 상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석유 투자는 일리 있는 선택이다.

다만 석유는 등락폭이 큰 고위험 종목으로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데 얼마나 걸릴 지, 그동안 어떤 우여곡절이 벌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레버리지가 있는 상품을 이용한 단타보다는 장기적 안목으로 대형 석유회사 뮤추얼 펀드에 여유 자금의 일부를 넣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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