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최전선의 그들

2020-04-21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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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자 LA타임스 1면에 눈길을 끄는 그림이 실렸다. ‘코로나바이러스 격리병동에서 영웅과 투사들을 스케치하는 ICU 간호사’란 제목을 달고 서울발로 소개된 기사와 그림들이다.

한국의 간호사들이 방호복을 입고 벗는 모습, 두겹의 장갑을 낀 채 힘들게 주사 놓는 모습, 산소요법 처치를 한 환자를 지켜보는 의료진, 보호장비 때문에 상처 난 이마와 코에 반창고를 붙인 얼굴, 격리병동에서 나와 샤워하고 머리 말리는 간호사….

치열한 코로나 최전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모습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스케치들이다.


심플한 선마다 따스한 감정이 묻어나는 이 그림들의 화가는 오영준(34)씨. 인천 가천대 길병원의 중환자실 8년차 간호사다. 미대를 다니다가 진로를 바꿔 간호사가 된 그는 2015년부터 취미 삼아 중환자실의 촌각을 다투는 의료현장을 묘사한 그림일기를 페이스북(‘간호사이야기’)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5년만에 팔로어가 6만8,500명이나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오씨는 올해 초 코로나 위기가 닥쳐오자마자 코비드-19 중환자 음압격리병상에 자원하여 투입됐다. 메르스 때와 마찬가지로 “같이 사는 가족이 없어 옮길 위험이 적기 때문”에 자원했다는 그는 바쁘고 피곤한 중에도 휴일이면 코비드-19와 싸우는 동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요즘 그의 그림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우주복처럼 거대한 ‘레벨 D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의 모습이다. 격리병동에 들어갈 때마다 입어야하는 이 방호복은 무게가 3킬로, 입고 벗는 데만 10~15분이 걸리고, 중간에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가는 전신보호복이다. 여기에 얼굴을 꽉 조이는 N95 마스크와 고글을 쓰고, 이중으로 장갑과 덧신을 신고 나면 통풍이 전혀 안돼서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찬다.

이 상태로 격리병동에 들어가 2~3시간을 쉬지 않고 일하는데 정맥주사 혈관 잡는데도 시간이 두세배 걸릴 정도로 움직임이 편하지 않다. 게다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숨을 쉬다보면 머리가 띵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되어 곧 탈수와 탈진 상태에 이른다.

방호복을 벗으면 샤워부터 해야 한다. 꽁꽁 싸매 입어도 빠져나온 머리카락이나 마스크와 고글이 가려주지 못한 뺨 주변을 씻어야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샤워하자마자 다시 방호복을 입고 병실로 뛰어 들어가야 할 때도 있으니, 얼굴에는 고글 자국이 깊게 파이고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다. 이른바 ‘밴드 투혼’이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한 방호복 때문인지 한국은 의료진의 감염사례가 극히 낮다. 3월말 통계로 코비드-19에 감염된 의료인은 100여 명, 전체 확진자의 1% 수준이다. 사망자는 4월3일에 의사 한명이 보고됐다.

한편 선진국의 대명사인 미국과 유럽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의료진의 희생이 크다. 4월20일 현재 캘리포니아에서만 3,100여명의 의료종사자가 코비드-19에 감염됐다. 전체의 11%가 넘는다. 하루 수백명씩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뉴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무려 30~40%의 의료진이 감염된 탓에 자가격리는 꿈도 못 꾸고 증상이 경미한 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환자들을 진료하는 실정이다. 미 전국적으로 병원 인력의 20%가 감염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미국 의료진 사망자는 최근 CDC(질병통제관리국)가 27명, 로이터 통신은 51명이라고 발표했는데 턱도 없이 과소평가된 숫자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수치를 공개하지 않는 병원이 많고 일원화된 집계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현 상황에서 코비드-19에 관한 집계가 정확하고 투명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은 어떤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코비드-19 사망자가 많은 이탈리아는 15일 현재 감염된 의료인이 1만4,066명(9.5%), 사망자는 의사만 107명이다. 스페인은 한달전 통계에서 확진자 4만여명 중 14%에 해당하는 5,400여명의 의료진이 감염됐고, 의료선진국 독일은 4월초 확진자 8만여명 가운데 의료진 2,300명 이상이 감염됐다고 발표했다.

이 모든 나라에서 코로나 일선 의료진이 한결같이 호소하는 것은 마스크와 방호복, 장갑 등 기본적인 보호 장비의 부족이다. “며칠 동안 마스크와 장갑 없이 일을 했다”거나 “마스크 하나로 며칠씩 버티고 있다”는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의사 간호사 테크니션 응급요원들은 코비드-19 환자 코앞에서 24시간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적절한 방호복과 마스크가 없어서 희생되고 있으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찾아온 것도 인재지만, 의료진의 희생도 순전히 인재다.

알림: 지난 주 칼럼 ‘코로나 시대의 예술가들’의 내용과 관련, 라크마(LACMA)는 코로나 위기 이전과 이후에 직원을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다고 알려왔습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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