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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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휴지

2020-04-20 (월) 한연성 통합 한국학교 VA 캠퍼스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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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쟁을 치르면서 휴지 사태를 보고 있다. 처음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휴지 사재기를 하는 미국인들에게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하곤 했다.
남편과 둘이 사는 우리 집은 모든 일상용품이 사재기를 할 정도로 많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휴지 사재기를 보면서 어린 시절이 떠 오른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서울의 평범한 전통의 한옥집이었다. 자라면서 가장 큰 문제가 화장실과 목욕탕 사용으로 기억한다.

화장실은 집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당 끝에 위치했고 화장실 사용이 힘들어 어린 시절엔 변비도 감수하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전기를 절약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는지 화장실은 늘 빨간 꼬마전등이 켜졌었다. 당시 어린 나에게는 “무서운 곳”이 화장실이었고 더군다나 4대가 함께 살았던 우리 집은 화장실에 관한 한 그리 즐거운 기억이 없다.
오빠와 비슷한 또래의 삼촌과 고모가 있었기에 학교에서 사용했던 시험지가 주로 휴지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시험지를 잘 잘라서 화장실 벽 고리에 여러 장을 달아 놓으면 볼 일을 본 후에 휴지처럼 사용했었다. 성장하여 화장실 휴지가 나올 때까지 사용했던 시험지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 동생은 일찍 학교를 들어간 탓에 학교 적응이 더디었다.
받아쓰기를 하면 거의 빵점을 맞았고 창피함을 느껴야 자극이 되어 공부를 한다고 할머니는 시험지를 버리지 않고 늘 화장실에 걸어 놓았었다. 아울러 삼촌과 고모들의 비밀사도 여지없이 화장실에 가면 폭로가 되곤 했다.

요즘 쓰는 화장실 휴지가 나오면서도 그리 풍부하게 그것을 사용 못했던 지라 지금도 몸에 밴 절약은 누구 못지않을 것이다. 그런 시절을 겪은 우리 세대들은 어렵게 살았던 도움으로 휴지가 없더라도 아마 그리 큰 호들갑은 없을 듯하다.
전대미문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요즘 오래 전 처음 들었던 사재기란 단어를 심심찮게 듣고 있다.

사재기란 이기주의의 다른 말이라고 배웠던 우리는 방송이나 신문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럴수록 우리가 서로 나누면 더 좋을텐데.
아마도 지금의 팬더믹이 지나면 우리의 삶의 양도 질도 바뀔 것 같다.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는 이제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나저나 이 어려운 시간이 빨리, 후유증이 더 많이 남지 않게 지나가길 기도할 뿐이다.

<한연성 통합 한국학교 VA 캠퍼스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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