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친구들이 공감하는 이상한 패턴이 있다.워낙 털털하게 다니는 나도 한국에서는 적어도 기초화장에 입는 옷에 조금 신경 쓰고 다니지만, 미국만 오면 제대로 된 화장하는 날이 손에 꼽게 된다는 것. 사람 좀 다닌다고 하는 곳에 친구라도 만나러 가는 날이 생기면 늘씬하고 예쁜 언니들한테 한껏 주눅들어 단기 노력파가 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프로 오지라퍼들이 나를 화장대 앞에오래 앉아있게 한다. 피곤해 보인다는 둥, 무슨 자신감이냐는 둥, 머리는 감았냐는 둥 별것도 아닌 말에 성심껏 싸워 예민보스로 등극하고 싶지도,괜히 혼자 기분 상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보통 고양이 세수만 겨우 한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고 잠옷만 겨우 벗은 부조화 패션으로 거리를 활보해도 무관하다. 물론 미국도 어떤 지역, 어떤 집단이냐에 따라 개개인의 경험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 온 미국인들은 내 외모에 침묵해 왔다. 아, 어디서 얻어 주어온 홈쇼핑 셔츠를 자기가 좋아한다는 둥 커피 머신을 기다리는 2분의 시간을 채우기 위한 한 헛소리는 들어보았지.내가 경험한 여기 사람들은 남 일에 유난히 관심이 없다.
코로나 19사태가 한국에서 먼저 터지고 걱정하는 가족단체 카카오톡이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 미국에서도 천천히 몇몇 확진자 상황이 기사화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미국 사회를 갈아엎고 있다.
처음에는 이 사태가 내 인생에 개인적으로 크게 영향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큰 가게에 손 소독제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동료들이랑 점심 때 회사 창고 털어서 블랙 마켓을 시작하자고 농담이나 했고, 휴지 같은 생필품 사재기가 시작될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이제 쾌변 포기해야 하냐며 친구들과 낄낄거렸다.
그렇게 철없이 “재택근무 만세!”를 외치며 침대에서 노트북이나 뚝딱거리다 엎어져 잠든 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봉쇄 규율을 우습게 여겼다가 벌금을 물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버클리 친구, 후배들은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연락을 전해왔다.
마침 똑 떨어진 두루마리 휴지를 구하러 기름과 주말을 통째로 날리고 나서야 이 모든 상황이 피부로 와 닿았다. 그리고 무섭게도 이기적으로 돌변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휴지가 떨어졌다는 동료의 한탄에도 내가 조금 어렵게 구했다는 이유로 치사하게 입을 싹 다물었고, 한국에서부터 날아온 충분한 양의 마스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훨씬 위험하실 어르신께 몇개 나눠드리는 것에 입술은 바짝 말라왔다. 짧은 산책 중 코라도 훌쩍이는 사람이 있으면 미간을 찌푸리며 내 자신을 보호하기에 앞섰다. 봉사하던 기관에서 날아온 기부 권면 이메일도 “이런 추세면 나도 언제 잘릴 지 몰라” 하는 끝도 없는 걱정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무시해왔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해 햇반을 백 개는 챙겨두었다는 말에 부모님은 무슨 전쟁났냐며 웃으셨다. 막연한 공포로 불거진 분위기와 사회 약자들이 가장 먼저 희생되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이 전쟁과 비슷하게 느껴져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기 너머로 함께 웃어넘겼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밤 창문에 반사되어 보이는 햇반 박스들을 뒤로 한 채 전쟁 소설에서나 읽어온 인간의 낯짝, 나밖에보지 못하는 모습에 나 자신이 그 어느때보다 못생겨 보였다.
지금 이 급변들이 누구에게나 조금은 전쟁 같으리라 예상한다. 그리고 모든 전쟁이 그렇듯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
스스로와 제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내 것을 잃어가는 가운데서도 용기내서 나누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며 공포 속에서도 희망을 놓치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심한 경계에 얽매여 외로워하고 있을 나 자신에게 숭고한 자유를 주기도 해야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잃어버린 감사한 일상을 주목시킨다. 나 역시 웅얼거리는 수다를 배경음악 삼아 커피샵에서 읽는 책 한 권과 별 의미 없는 오지랖, 예상치도 못한 우연한 만남이 참 그리워진다. 그러다 문득 내게는 잃어버린 허전함이 누군가에는 일상이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홀로 늙어가시는 어르신, 깊은 상처와 다름으로 집 밖을 나올 용기조차 없었던 장애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젊은이의 하루같이 말이다.
더 잃게 될까봐 꽁꽁 쌓아두었던 햇반과 마스크 박스 너머 나의 무관심 속에 항상 피어나고 있었던 누군가의 전쟁같은 일상도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과 같은 긴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 많은 것들이 잃고 사라진 곳에 분명 더 선명히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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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