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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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색함

2020-03-30 (월)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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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불원간에 겪어야 하는 진실이 죽음이다. 미국의 개척가이며 철학자이기도 하였던 윌리암 펜은 “죽음이란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사랑이나 우정 등 고상한 정신은 육신이 죽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여 죽음에 도전하고 있다. 옛 철인 세네카는 “죽음은 어떤 자에게는 징벌이며, 어떤 자에게는 은총이고, 어떤 자에게는 혜택이며, 어떤 자에게는 해결이다.”고 하였다.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열린 마음이다.

로마의 심한 박해 속을 살던 기독교인들은 Momento meri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이 라틴어의 의미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나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완성’으로서 순간마다 죽음을 똑바로 기억하며 살자는 서로의 격려가 들어있는 인사말이다. 성경에 창조설화가 나오는데 모든 생물을 창조하는 신이 창조 때마다. “좋더라.(It is good!)”하는 탄성을 발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생명이 죽음으로서 완결된 때도 역시 “참 좋았다.(It was good)”로 완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국의 위대한 문학가 스티븐슨(Robert Stevenson)은 폐결핵으로 겨우 44세에 사모아 섬에서 죽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한 손으로는 며누리이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셰익스피어의 책을 안고 최후의 시를 읊었다. “저 넓은 별하늘 밑에/ 무덤을 파고/ 나를 묻어다오/ 살기도 기뻐하였으니 죽기도 기뻐하리/ 나는 뜻을 품고 지금 눕노라/ 나를 위한 조사는 이렇게 말해다오/ 이 사람은 자기가 바라던 장소에 묻혔다고/ 사공은 바다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고/ 사냥꾼도 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바울은 죽음을 향하여 승리의 개가를 노래하였다. “죽음아 네 이김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린도 전서 15:55) 죽음은 이미 우리 삶 속에 들어와있다. 인간은 살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죽기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무서워할 것도 아니다. 죽음은 졸업이며 또한 진급의 날이다.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상급이다.

나는 어느 분의 매장을 위하여 공동묘지에 갔다. 사체를 인부들이 매장하는 순간 어디선가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장소에서 한 젊은 여성이 아름다운 음성으로 노래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찬송가 289장) 아마도 젊은 남편을 병환이나 사고로 잃은 미망인일 것이다. 혼자 무덤을 찾아와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교우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매장의 마지막 말을 할 필요가 없군요. 저 분의 노래를 들어보셔요. 훌륭한 승리의 장송곡이 아닙니까!”

만일 죽음이 육체를 입은 한 생명의 완결이라면 축하할 일이다. 땀과 고뇌의 결정체로 한 권의 저서가 나왔을 때 출판 축하회를 열듯 한 생애가 완성되었다면 눈물의 장송곡보다는 환희의 찬가를 드려야 옳다. 그 날은 개선의 날인 것이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죽는 순간 “내 나이를 완결하였다.”고 읊조리고 눈을 감았다. 죽음을 완성의 순간으로 본 것이다. 일본 빈민의 친구로 평생을 산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 (賀川豊彦)는 죽는 순간 “이것으로 됐다.”고 하며 눈을 감았다. 승리자의 훌륭한 죽음이었다.

미국 속담에 ‘닳아 없어지는 것이 녹슬어 없어지는 것보다 낫다.”(It is better to wear out than run out)는 말이 있다. 죽음이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비참한가!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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