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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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단성면, 올핸 더디 폈으면 좋으련만 토담 위 매화는 매정도 하네

2020-03-2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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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벗고 어디라도 나가고 싶은 답답한 날들의 연속이다. 봄이 오는지 가는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온통 정신이 팔린 사이 남녘의 매화는 이미 절정을 지나고 있다. 코로나 기세가 누그러질 때까지 올해 봄꽃은 조금 더디 피었으면 좋으련만, 4월에나 만개할 것 같던 벚꽃도 망울이 한껏 부풀었다. 경남 산청의 남사예담촌 봄 풍경을 전한다. 안동 하회마을과 비견되는 곳이다. 조바심은 잠시 내려 놓고, 이 사태가 마무리되면 마음 놓고 다녀올 여행지 목록에 저장하면 좋겠다.

◇고가마다 매화 한 그루…그중에서 으뜸은 원정매

전통마을의 미덕은 있는 듯 없는 듯, 낮은 자세에 있다. 산청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지리산 중산리 계곡으로 차를 몰다 보면 남사예담촌을 만난다. 도로에선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난데없이 나타난 육교가 아니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시골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육중한 석재 육교는 마을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산자락으로 연결된다. 언덕배기에 세운 정자에 오르면 예스런 마을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작은 하천이 돌아 나가고, 그 안팎으로 기와집 65채를 비롯해 150여채 주택이 골목과 담장을 맞대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남사예담촌은 사단법인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에서 1호로 지정한 전통마을이다. 현재 자연과 환경을 보존하고 전통을 발전시켜 나가는 전국 9개 마을이 목록에 올라 있다.

남사예담촌의 아름다움은 골목 담장에 있다. ‘예담’은 옛 담장이라는 의미다. 예를 다해 손님을 맞는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3.2km에 이르는 토석 담장은 국가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는 대략 2m, 민가의 담장치고는 소박하지 않은 편이다. 골목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말에 올라탄 사람 눈높이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행세깨나 했던 집안이 많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담촌은 단일 성씨 집성촌이 아니라 진양 하씨ㆍ성주 이씨ㆍ밀양 박씨ㆍ전주 최씨ㆍ연일 정씨 5개 집안이 조화롭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집안 사이 은근한 경쟁심은 주민을 결속하고 마을을 지켜 온 힘이기도 하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매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친다. 높은 담장 위로 군데군데 매화가지가 멋스럽게 드리운 모습이 보인다. 마당에 한 그루씩 키워 온 매화는 양반 가문의 절제된 기품을 상징한다. 향 좋고 화사해 네댓 그루를 심어 흐드러지게 봄을 즐길 만도 하건만, 다섯 집안의 고가 마당에는 딱 한 그루씩의 매화만 심겨 있다. 이름하여 ‘오매불망(五梅不忘)’이다. 집안의 역사처럼 최소 수백 년을 이어온 나무이거나 후계목이니, 정성스레 가꾼 마음은 자나 깨나 잊지 못하는 오매불망(寤寐不忘)과 다를 바 없다.

그중에서도 수령 670년이 넘는 하씨 고가의 홍매화는 ‘원정매’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원정은 고려 후기 문신인 하즙(1303~1380)의 호다. 지금은 2007년 고사한 어미 나무의 뿌리에서 자란 매화가 다시 화사하게 마당을 밝히고 있다. 매화나무 앞 비석에 그가 쓴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아마 여러 그루였다면 그렇게 맑은 정신으로 글 공부에 집중하진 못했을 듯하다.

원정매와 더불어 단속사 터의 ‘정당매’, 조식 유적지의 ‘남명매’는 ‘산청삼매’로 불린다. 수형이 특별히 빼어나거나 꽃이 유난히 풍성해서가 아니다. 원정매와 마찬가지로 나무의 내력이 전해 오는 ‘족보 있는’ 매화이기 때문이다. 남명매는 조선 전기 성리학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인 남명 조식(1501~1572)이 심은 나무다. 남사예담촌에서 약 11km 떨어진 곳, 남명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하던 산천재(山天齋) 앞마당에 있다. 바로 앞에는 맑은 개울(덕천강)이 흐르고, 매화 가지 사이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산천재 기둥의 칠언고시를 보면 남명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련만, 내가 천왕봉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와서 무엇을 먹을까, 은하 같은 십 리 물은 마시고도 남겠구나.’ 지리산 능선은 우람하고 산천재 앞뜰엔 봄볕이 유난히 따사롭다.

정당매는 고려 말 정당문학(종이품) 벼슬을 지낸 회백(1357~1402)과 그 형제가 심은 매화다. 정당매가 위치한 단속사 터 역시 남사예담촌에서 멀지 않다. 단속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지금은 당간지주와 2기의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정당매는 석탑 뒤편에 있는데 비각이 아니면 찾기 어렵다. 현재는 2014년 고사한 나무 옆에 후계목을 심어 관리하고 있다. 단속사 입구에 남명이 사명대사 유정에게 남긴 시비가 남아 있다.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사명대사가 장차 큰 인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담장과 어우러진 남사예담촌의 노거수

남사예담촌이 전통마을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지키고 가꾸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도 마을엔 한때 유행했던 슬레이트 지붕을 찾아볼 수 없다. 200여채에 이르던 전통가옥은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45채가 남았고, 근래에 20여가구가 새로 들어섰다. 지키겠다는 고집이 인공구조물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남사예담촌에서 예스런 집과 토담만큼 돋보이는 게 오래된 나무다. 매화나무와 함께 집집마다 오래된 회화나무, 향나무, 배롱나무 한두 그루씩은 보유하고 있다. 성주 이씨 고가의 450년 된 회화나무는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다. 이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에도 300년 넘은 두 그루 회화나무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엇갈려 자라고 있다. 일명 ‘선비나무’이자 ‘부부나무’로 마을의 상징이다.

마을 주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에 요구되는 사회적 책무)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경주 최부자네가 베풂의 법도를 배워 간 곳이 바로 이씨 집안이라 주장한다. 최씨 집안 사람이 봉제사 때 이곳에 하룻밤 묵으며 손님을 대접하는 방법을 배워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키면서도 한편으로 나누는 가문의 품격을 흠모한 까닭일까. 골목 안 선비나무 앞에서 정성으로 기도하는 외지인의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된다고 한다.

원정매로 유명한 하씨 고가 뒷마당으로 나가면 수령 620년 정도로 추정되는 감나무도 있다. 이 역시 하즙이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기록상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다. 밑동이 헐고 파였지만 지금도 열매를 맺는 토종 반시 감나무로, 산청 곶감의 원종으로 대접받고 있다. 산청 주민들이 곶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건 바로 이 나무 때문이다.

◇문익점 목화 시배지와 성철 스님 고향

산청 단성면은 고려시대 말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 온 문익점(1329~1398)의 고향이다. 남사예담촌에서 불과 5km 떨어진 곳에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가 있다. 문익점이 붓 대롱에 숨겨 온 목화 씨앗을 장인과 함께 재배에 성공해 전국에 보급한 곳이다.

이곳에는 전시관(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휴관)과 세종대왕이 하사한 부민각이 함께 있다. 면화산업으로 국가의 부를 늘리고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킨 공로로 하사한 건물이다. 바로 옆에는 효자비각이 세워져 있다. 왜구의 침입으로 마을이 불타는 와중에도 3년간 어머니의 무덤을 지킨 문익점의 효성을 기려 고려 우왕이 하사한 효자리(孝子里) 비석을 보관한 곳이다. 전설처럼 전해 오는 문익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하나를 건너면 강변에 겁외사라는 사찰이 있다. 성철 스님(1912~1993)의 생가 터에 지은 사찰이다. 대웅전 외벽은 석가모니 대신 눕지 않고 수도하는 장좌불와 8년, 토굴 수행 10년 등 출가에서 입적 후 다비식까지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동상 뒤편 생가에는 부유했던 그의 집안 내력과 공부방을 재현해 놓았다.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집안의 장남이자 가정을 꾸린 가장이면서도 ‘중이 안 되면 죽을 것 같다’는 말로 아버지를 설득한 깊은 뜻을 중생이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사찰 앞 강변은 묵곡생태숲공원이다. 경호강 상류로 맑은 강물을 내려다 보며 걸을 수 있는 목재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하류 제방에는 대규모 대숲이 방풍림 역할을 한다. 연둣빛이 오르는 버드나무와 대숲에 일렁이는 바람이 유난히 싱그럽다. 바다보다 푸른 강물을 보고 있으면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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