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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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

2020-03-26 (목) 이경희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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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지는 일이 고단하여
앞뒤도 볼 수 없는 나는
눈 먼 맨드라미

누가 피어라 하지 않아도
낮은 담장 아래 헌 내의처럼 피어서
모란 보내고 작약 보내고
나보다 늦게 태어나는 꽃들 다 보내고
시린 발을 모으고 홀로 피어있던 꽃

목마른 뱀이 꼬리를 감춘 채
장독대 밑으로 스며들 때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
찌그러진 술 주전자를 들고서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리던 꽃


어머니, 저 붉은 맨드라미의 얼굴이
밥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를 기다리던 밤하늘엔
수제비 같은 별이 뜨고
툭 터진 꽃씨 하나를 입에 물고
긴 목을 늘어뜨린 채 잠들던 꽃

꽃말에 속고 더러는
맨드라미를 민들레라 부르며
은유의 세월을 밀고 왔으나
맨드라미는 맨드라미

이제는 피고 지는 일도 시들해져
좌우도 분간 못하는 나는 끝내
눈 먼 맨드라미

<이경희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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