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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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선물

2020-03-26 (목) 김미원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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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가을 친정엄마가 치매를 이겨내지 못하고 가족 곁을 떠났다. 무기력하고 우울한 나보다 언니의 슬픔은 더 처참했다. 우린 엄마라는 단어도 꺼내지 못했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나와 언니는 49재 동안 서로의 곁에 있으면서 서로에게 위로를 받아야만 했다. 몸이 바빠지면 슬픔이 옅어질 거 같아 언니와 나는 부모님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여행을 하면서 엄마를 보내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보니 딸로서, 장녀로 살면서 가족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꿈 때문에 엄마와 다툰 일들이 기억났다. 우리의 꿈이 기억나자,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몸이 알아가는 나이가 되다 보니 조바심이 났다.
우린 더 늦기 전에 꿈을 찾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딸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다 가신 부모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아직 풀지 않은 선물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자신만이 풀 수 있다는 것을 엄마가 떠나자 깨달았다.

오 남매의 셋째로 태어난 첫 딸인 언니는 귀여움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곱게만 자라던 언니가 고등학생이 될 즈음 집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기울던 가세와 엄마의 잦은 병으로 언니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집안일을 척척 잘해나갔다. 그때부터 가족은 언니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부모님조차 언니에게 의지하다 보니 언니는 자기의 꿈을 입 밖으로 표현하면 불효라 생각했다.


언니는 직장을 선택해 살림을 보탰고, 결혼 후에도 친정 식구와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결혼해서 낳은 조카 둘을 훌륭하게 키워 출가시키고 이제 본인의 삶을 살 때쯤 친정엄마를 모셔야 하는 일이 발생했고, 언니도 암 진단을 받았다. 치매 걸린 친정엄마를 모시며 자기의 암 투병을 하던 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요양원에 가야 하는 병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지낸 10개월은 엄마에게도 언니에게도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었다.

막상 엄마가 돌아가시자 자기가 잘 모셨으면 더 오래 사셨을 터라며 자책했다. 언니는 자식을 묻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음식을 소화 시키지도 못하고 얼굴은 점점 칠흑빛으로 변했다. 언니마저 쓰러질 것 같은 불안에 무서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고 눈물만 났다.
나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언니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와 같이할 수 있는 캘리그라피 수업을 찾아내 등록했다.
캘리그라피를 잘하려면 구도 잡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미술반까지 등록시켰다. 다행히도 언니는 등 떠밀려 등록한 수업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조금 더 일찍 공부한 나는 밤마다 몇 시간씩 언니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쳤다.

드디어 언니가 웃기 시작했고 얼굴에 홍조가 돌아왔다. 같이 학원에 다니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언니의 꿈이 화가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는 미술에 소질 있는 학생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감격해 했다. 미술 선생님은 또한 숙제로 내주는 작품마다 예술 감각이 특별하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언니가 밤새워가며 연습할 때마다 나도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며 응원했다. 우린 서로의 웃음을 보면서 서서히 슬픔 너머 무엇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확신했다.
언니는 착한 장녀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기의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육체의 병도 엄마를 끝까지 못 모셨다는 마음의 병도 캘리그라피와 미술에 몰입하면서 벗어나고 있다. 엄마의 부재가 없었다면 언니의 꿈을 나는 몰랐을 것이고 언니도 잊은 채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언니의 희생을 알면서도 도움 주지 못해 늘 미안했는데 나에게 고맙다며 웃는 언니의 말에 기쁘면서도 눈물이 났다. 언니는 2019년 1월에 캘리그라피 사범 자격증을 볼 수 있는 실력이 되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내년 1월 수채화 수업까지 재등록했다는 소식도 왔다. 나에겐 엄마 같은 언니가 아직 풀지 못한 선물 보따리를 푸는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오늘 아침 온라인으로 주문한 튼튼하고 멋진 가방이 도착했다. 한국에서 언니의 미술용품을 사러 다닐 때 즐거워하던 모습이, 미술용품을 넣고 다닐 가방을 못 찾아 섭섭해하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었다.

언니에게 언젠가 자매 전시회를 열자는 나의 당찬 포부에 언니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그러자 좋아하는 거 해보자”. 나는 이 문구를 캘리그라피 엽서로 만들어 미술가방 속에 넣고 포장을 했다. 언니의 풀지 못한 꿈들이 이 가방과 함께 풀어질 것을 기원하자 포장하는 손이 떨리고 엄마의 환한 미소가 생각났다.
포장지 위로 눈물이 뚝 뚝 떨어져 얼룩이 생겼다. 엄마가 언니의 선물에 이렇게 애정을 보탠다는 생각에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아주 오랜만에 경쾌했다.

<김미원 /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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