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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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두개의 조국

2020-03-20 (금)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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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미국에 온 지 45년 만이다. 딸 셋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아내는 이미 오래 전에 시민권을 취득하여 우리집에서는 나만이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가족 동반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면, 나는 내국인 입국심사를 거쳐야 했고 다른 가족들은 외국인 입국심사대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미국 시민권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여러차례 시민권 신청을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오래 시간을 보낸 것은 무엇보다도 한국 국적을 포기한다는 찝찝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젊었을 때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중에라도 혹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활동하게 된다면 외국 국적 취득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리고 영주권자로 살아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다보니 나의 정체성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이 들게 되었다. 나는 한국사람이지만 한국에서 20년 남짓을 살았고 미국에서 그 두배가 넘는 기간을 살았다. 세금도 미국에만 내다보니 한국에 기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한국에 가도 내가 조금 외국 사람처럼 생각 들 때가 종종 있었다. 다시 한국에 가서 산다는 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미국에서 살다가 미국 땅에 묻힐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어쩌면 시민권자가 되기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반 미국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부 한국 사람들이 반미 데모를 하는 모습이나 친북 대학생들의 미국 대사관저 월담에 관한 뉴스를 대할 때면 불편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도대체 미국이 한국에 무엇을 그리 잘못하였나. 한국이 미국의 경제 식민지라고? 미국이 한국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를 하였단 말인가? 오히려 한국이 미국보다 더 많은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 때문이라고? 물론 휴전선이 이념대립의 경계선이기도 하여 어느 정도 미국의 이익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미 방호조약, 우호조약 등 우방국과의 약속 이행을 위해 한국 주둔을 계속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가 남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가. 나의 이런 생각은 가끔 의도치 않은 언쟁을 일으키곤 한다. 한국에 있는 젊은 지인과 얘기하다 보면 나는 거의 이완용 정도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가끔 나는 이상한 사람 (내 기준으로)들을 만난다. 미국에 살며 미국 시민이 되고나서도 ‘미국놈들 어쩌구…’ 하면서 미국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듣고 있자니 부글부글 끓어서 대꾸하다보면 그냥 말싸움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면 마치 내가 한국을 싫어하거나 배반하는 사람처럼 취급될 때가 있다. 그렇지않다. 나도 그 누구 못지않게 한국을 사랑한다. 한국과 나의 관계는 나를 낳아준 천륜이라면 미국과 나의 관계는 지난 45년 동안 나를 품어준 의리의 관계이다. 한국은 나의 모국이요,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나의 조국이다.


조국의 사전적 의미는 두가지인데 하나는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국적이 속하여 있는 나라’이다. 이제 나에게는 두개의 조국이 있는데 한국은 전자의 의미의 조국이고 미국은 후자의 의미의 조국이다.(시민권 선서를 하기 전 ‘조국’이라는 단어를 컴퓨터에 입력하였더니, 내가 찾으려던 ‘조국’ 단어 뜻은 찾기 힘들고 대신 ‘조국 수사, 조국 사태, 조국 사퇴, 조국 아들, 조국 김남주… 등등 이 나왔다. 하,참내…)

미국시민이 되기 위하여는 시민권 선서를 해야하는데 그 내용이 자못 비장하다. “나는 지금까지 속해있던 국가에 대한 모든 충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모든 내외부의 적으로부터 미국의 헌법과 법률을 수호, 지지함을 선서한다. 나는 국가가 요구하면 무기로 무장하며… 이 모든 의무를 자발적으로 택하오니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라는 것이 대략의 선서 내용이다. 시민권 선서를 하기 전 어느 연사가 이렇게 말했다. “아메리칸 인디언을 제외한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은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후손이다. 아인슈타인, 매들린 울브라이트, 루퍼트 머독, 아리아나 허핑톤 등등… 이민 1세대로서 유명인사가 된 사람들도 수없이 많다. 여러분들도 …”. 맞는 말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14% 정도가 이민 1세대 들이다. 매년 칠,팔십 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 시민을 취득하며 그 수는 해가 거듭될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민자들로 인한 인구 증가, 노동력 증가, 상품의 소비 증가 등의 미국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부분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한국과 미국 중 어느 나라를 더욱 나의 마음 속에 품고 살아야 할까 하는 것은 큰 고민거리가 아니다. 두개의 나라가 모두 나의 조국이다. 한국은 어머니 같고, 미국은 아버지 같다. 나를 낳고 자라게 해 준 한국을 이 세상 사는 날 동안 잊을 수가 없으며, 내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며 살아온 미국의 친절함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리라.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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