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할 물건이 하나 있어 지난 금요일 한인마켓에 들렀다. 이른 오후임에도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꽉 들어찼고 10여대의 차들이 주차공간을 찾느라 빙빙 돌고 있었다. 겨우 차를 세우고 들어간 마켓 안 광경은 무척 낯설었다. 평소 서너 명 정도 기다리던 계산대마다 카트에 물건을 가득 담은 사람들이 수십 미터씩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계산하려면 1~2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냥 나왔다. 화요일 아침 다시 마켓에 가보니 줄은 더 길어져 있었다. 대표적 비상식품인 라면은 물론 쌀과 고기까지 동난 상태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몰렸음에도 차분했던 한인마켓들과 달리 미국 매장들은 소란스러운 곳들이 많았다. 서로 먼저 물건을 가져가겠다며 고객들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 흉기를 휘두르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뉴스도 들린다. 마스크와 손세정제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고 비상용 식료품 등도 진열하자마자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서 이른바 ‘패닉 바잉’(panic buying)이 전 지구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화장지 사재기 열풍이다. 마스크와 손세정제는 위생용품이고, 비상 식품은 기본적 필요와 관련돼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화장지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동나고 있는 것인지 잘 납득되지 않는다. 온갖 루머와 가짜뉴스들이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다. 사재기를 자제해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부에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패닉 바잉’은 대표적인 군중심리 형태다. 이런 행태의 기저에는 두 가지의 속성이 작용하고 있다. 그 하나는 ‘레밍 신드롬’이라 불리는 편승효과이다. 레밍은 스칸디나비아에 사는 들쥐의 일종이다. 마치 레밍이 떼 지어 몰려다니듯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시작되면 영문도 모른 채 그냥 거기에 휩쓸려 같은 행동을 한다. 1980년 전두환 집권 후 존 워커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국민을 레밍에 비유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편승효과에 더해 이런 ‘패닉 바잉’을 부추기는 또 다른 심리기제는 ‘FOMO’(Fear of Missing out)이다. 단어 뜻 그대로 자기 혼자 제외되거나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심리를 자극하는 기법은 마케팅 전략으로 흔히 사용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는 선택과 행동에 나만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초조와 불안을 안겨준다. 마치 낙오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SNS가 보편화되면서 뒤처지는 것, 제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보다 한층 더 빨리 그리고 더 깊이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고 있다.
워커 사령관은 한국국민을 레밍에 비유했지만 미국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주리대학 도시문제 전문가인 데니스 저드 교수는 “미국인을 개인주의자로 보는 것은 난센스”라며 미국인들 역시 다수에서 떨어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는 레밍 같은 존재라고 꼬집는다. 인간의 속성은 거기서 거기라는 애기다.
이런 보편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된 한국에서 ‘패닉 바잉’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오랜 분단으로 반복돼 온 위기상황 속에서 습득한 학습효과와 함께 시스템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바탕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미국 ABC 뉴스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자가 격리된 사람들에게 음식물 박스를 배달하는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란 제목의 영상에 미국의 네티즌들은 “배울 것이 많은 나라”라는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내가 한국인이었으면 좋겠다”며 부러움을 나타낸 네티즌도 있었다. 한국국민들의 차분하고 성숙한 대처는 ‘패닉 바잉’이라는 비합리적 행태가 인간의 속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합리화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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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