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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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미니스트다

2020-03-16 (월)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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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부터 절친한 여성 동료의 승진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그간의 고생과 노력을 알기에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그 날이 특별히 세계 여성의 날이었기에 그 소식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나는 여중-여고-여대를 나왔다. 페미니즘 교육 하나는 제대로 받았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그리 긍정적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스스로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은 남녀평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 ‘여자가 우선이다’ ‘여자가 우월하다’ 식의 주장이 아니다. 즉,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여야만 한다. 21세기에 남녀평등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눈부신 여권 신장이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지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하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아직도 어느 나라에서는 여성에게 기본적인 교육의 권리, 투표권이 없다.


그래도 그들 중 송곳같이 튀어나온 여성들이 있다. 그녀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세상에 도움을 청한다. 2014년 탈레반에 맞서 여권 신장 운동으로 세계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처럼 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말라라들이 지금도 싸우고 있다.

그런데 한편 한국이란 나라엔 지금 여성혐오자들이 넘쳐나고 여성을 싸잡아 폄하하는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난다. 맘충, 김여사, 된장녀, 김치녀. 나는 그러한 신조어의 확산이 하나의 하류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두렵다.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나이가 들어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을 때 어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또 어떤 괴이한 단어들로 나와 내 동료 여성들을 비아냥거릴지. 그리고 어쩌면 나도 자연스럽게 그 단어를 쓰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유전자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여성혐오 현상이 지속된다면 여성들은 더 이상 번식하지 않는 쪽으로 진화할 것이다. 지금도 저 출산에 시달리는 한국은 이제 아기 울음소리를 점점 더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가치가 폄하되고 때로는 생존도 위협받는 세상에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멍청한 여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감사하게도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어 한 모임에 임신 소식을 알렸더니 한 남성 회원으로부터 아들 낳는 법을 미리 알려줬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바로 딸도 좋다고 했다. 아직 성별을 알지 못하지만 내 뱃속에 아이가 이 말을 들으면 참 기분이 나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사는 내가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이 깃든 말을 들어야하다니 참 놀랍다.

여자들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세 명 이상 모이면 접시도 깨는데 더 많은 여자들이 연대하면 이 부조리한 세상이라는 접시도 옴팡 깨고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지 않을까? 모이기만 하면 지지고 볶는다는 그 여자들이 지지고 볶고 접시를 깨도 좋으니 제발 모여서 일을 냈으면 좋겠다.

승진한 그녀가 제 자리에서 제 역량을 발휘하여 빛난 것처럼 나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내 안의 그녀와 내 동료 여성들 속 그녀를 많이 일깨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글을 통해서라면 더욱 좋겠다.

<이보람 adCREASIANs 어카운트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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