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사과정이라는 정거장

2020-03-09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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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정거장 같은 곳이야. 여기는 대학도시라서 학교 스케줄에 맞춰서 사람들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여기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없고 정을 좀 붙였다 싶으면 금방 떠나가.”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 선배가 해주었던 말이다. 새로운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바빴던 내게는 먼 얘기처럼 들렸다. 선배가 곧 졸업할 때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하고 먼 이야기로 치부해 놓았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다. 대학원 과정을 그만두거나, 다른 학교로 옮겨가게 되거나, 취직을 하게 되어 다른 도시로 떠나갔다. 안 그래도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박사과정을 하고 있던 내게는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가는 게 너무 가슴 시리게 다가왔다.


정거장을 지나가는 버스만 놓쳐도 아쉬운 게 사람 마음인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한둘씩 떠나가는 건 오죽할까.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그들의 미래에 축복을 보내면서도, 점점 혼자가 되어가는 나를 돌봐야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정거장에 우두커니 서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배웅했다. 어떤 사람은 찬란한 미래를 손에 쥔 채 많은 사람의 환송을 받으며 떠났고, 어떤 사람은 주변에 전혀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짐을 싸서 사라졌다. 나름대로의 이유로 여기를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도, 나만 아직도 이 정거장에 묶여있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다들 미래를 향해 가는데 나는 정거장에 우두커니 망부석처럼 서 있다니.

내 미래를 향한 티켓은 언제 끊을 수 있는 걸까? 끊을 수 있기는 한 걸까? 겨우 이 정거장까지 왔는데 사실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닐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계속했고, 악순환의 고리에 빨려 들어갔고, 정거장 안에서도 숨어 다녔다. 반짝이는 ‘미래행 티켓’을 받아서 손에 쥐지 않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그런데 2020년의 어느 날 내게도 이 티켓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준비를 해왔던 터라 다행히 기회를 잡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음 목적지로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티켓은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충분히 은은한 빛을 줬다.

오늘, 이 정거장을 떠나기 위한 마지막 관문, 박사논문 심사가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봄 날씨처럼 맑은 미소를 띄고 와줬고, 모두가 내게 “김 박사 축하해!” 하며 축복의 말을 던져주었다. 바이러스 때문에 악수하거나 안아주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인사법이라며 팔꿈치를 맞대며 나를 환송해 주었다. 지도교수님 가족은 박사 축하 케이크를 직접 구워서 파티를 열어주셨다.

선배의 말대로 이 학교는 정거장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정거장에 서서 기다리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괴롭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목적지를 탐색하며 내실을 다져가는 시간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기다림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괴로움 외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는데, 막상 마지막에 와서야 깨닫다니.

지금도 각자의 정거장에 서서 미래를 향한 티켓을 기다리고 있는 모두에게 따뜻한 공감과 위로를 보내고 싶다. 모두가 원하는 목적지로, 원하는 티켓을 쥐고,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떠나길.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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