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고향의 버드나무, 올 봄도 푸르련만…

2020-03-05 (목) 김준혜 부동산인, MD
크게 작게
아무런 예상없이 마주한 길가의 청매화가 오늘 유달리 눈에 들어온다 눈이 녹는 그 알큰한 숨결로 봄사랑을 피우는 모양이었다 동네로 들어오는 어귀, 담장 너머 보이는 벚꽃 역시 이에 질세라 올해따라 어쩌자는 건지 흩날리는 요염이 그토록 화사한 건지… 초경을 맞는 딸아이를 아무런 예비없이 겪는 어미의 당혹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 유별남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있어 돌아온 집, 무심코 틀어놓은 유튜브에서 어디서 물고왔는지 별안간 가슴을 후비는, 그 서늘한 노랫가사가 다시금 앞선 꽃멀미를 거푸 불러들였다.

무슨 청승인가 싶지만 다름아닌 고복수의 ‘타향살이’로 그 느리고 애절한 3박자 선율에 마치 한숨을 내뱉듯…..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가고 부평같은 내 신세, 혼자도 기가 막혀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집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불던 그 날은 어디갔나! 아,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우리는 언제나 타향~
엉뚱해도 이렇게 엉뚱할 수가….. 읊조려 들려오는 그 노랫가사에 그만 폭싹 주저앉았으므로 너무 까닭없어 홀로 강물에 번민하는 수풀을 뜯듯 그 연유와 곡절을 되새김 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고향!, 농경사회에서 상업이나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언저리에서 유년을 보낸 세대들이라면 무조건 우리 모두에게 고향이 있다 그게 설령 해방촌살이라 해도 또 사대문 안 반듯한 서울 토박내기라해도 고향하면 팔할이 겨울의 끝자락과 봄이 맞물려 있기 마련이어서 꼭 그게 ‘꽃 피는 산골’이 아니더라도 달처럼 부풀어 떠오르는 그 나름의 정서와 마음 속 사진 한컷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한강변 수심 낮은 곳의 투명하게 동그라미진 여린 얼음을 가슴 조이며 넘어가던 살얼음판과 골기와 지붕골을 타고내려온 고드름을 빨며 쥐불놀이로 까맣게 타들어간 논둑을 걷던 아이들, 강심을 향해 마치 이끌려, 미끄러지던 무릎썰매들의 그 은성한 무도회를…. 이제는 각기 흩어져 다른 하늘 밑에서 늙어가고 있을 그런 얼굴들이 피어오르다 사라진다.


낮에 본 꽃의 연상이었을까…. 무엇이 꽃과 같다는 말은 그 화려함의 극치를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한 때를 벗어나면, 그 번성한 그 무엇이 사위어 간다는 말을 역시 전제하고 있을 터.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없어진 마당에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들은 바뀌어도 너무 바뀐 세상에 추억의 소중함을 간직하지 못했고, 나라를 떠나 살아온 우리들은 어쩌다 건강검진과 함께 찾아가, 죽마를 타고 뛰놀던 그 깊은 유년의 뜨락을 막바로 찾아내지 못했다 ‘신동아 3차 아파트’로 바뀌어진 그 골목길에서 쓸쓸히 발걸음을 돌린 이가 비단 나뿐이었을까….

줄이 끊어져 가뭇없이 날아가던 아이들의 연줄처럼 이제 고향은 오로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만 그 통로가 존재하며 실제로는 세월과 그 연을 따라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은 아닐런지…..고향을 가진 마지막 세대였으나 그걸 후대에 넘겨주지 못한 첫 세대로서 그걸 비애로 느끼는 우리들의 소심이 이제는 자우룩한 한(恨)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을 노래한 85년전의 이 노래가 이토록 시리고 푸른 앙금을 풀며 몸을 감아 내려앉는 이유도 한 늙음의 묵직한 징표일게다, 그래 오로지 마음과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고향에 대한 헛헛한 그리움이리라.

어디 그뿐이랴! 고향에 관한 한, 1300년전 당나라 이백의 정야사가 그랬듯, 동시대를 살고있는 정태춘의 포크송 역시 가슴을 참으로 묘하게 파고드는 구석이 있다.
무너진 장독대에 들국화 술이 익어가고, 그 틈 사이로 난장이 채송화를 피우려 아침해가 뜨는, 담 그늘 아래 호랭이꽃 기세등등하게 피어나던 곳 툇마루 아래 어미개가 잠이 들고, 괘종시계 뚝딱 거리리던 대청마루와 우물가 너머 대롱대롱 수세미가 익어가던 곳.
과꽃 피는 화단에는 잠자리가 저녁바람에 투명한 날개로 하늘거렸으며 처자들 새하얀 손톱마다 붉게 물들어가던 봉숭아물과 가뭄이 극성을 부리던 어느해의 타는 저녁놀…. 모기 쫒으며 평상에 누워 북두칠성을 긋고 별을 우러르던 곳, 그 때 함께 했던 그들이 오늘도 무릎깍지 끼고 고향 떠난 우리들을 상기도 얘기할런지 이제는 자신 없는 일이 되고말았다.

이젠 그딴 것이 실재하지 않는 이유로는 우리가 너무 멀리 와서가 아니라 그들이 너무 빨리 떠나버려 그런 것은 아닐런지……참으로 기묘한 착란이겠으나 어째튼 올봄을 맞아 우리들의 상춘곡(賞春曲)으로는 고국의 버드나무도 이제 언덕마다 푸르렀으면….

<김준혜 부동산인, MD>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