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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목) 김효선 칼스테이트LA 특수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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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크윽하며 실소가 터지는 생각이 있다. 기억 속의 그 여인은 첼로를 들고 사뿐사뿐 무대로 나와 우아하게 한 소절을 켜기 시작한다. 잠시 음악을 끊고 본인이 얼마나 훌륭한 집안의 사람인지 소개한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그 성함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분이다”라고 운을 떼곤 다시 첼로를 켜다가 입을 열어 “그분들의 이름은 ‘영희와 철수’라고…” 심각하던 청중 사이에서 웃음이 나오자 잠시 기다렸다가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마아빠 이상으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유명하신 분”이라고 했다. 잠시 첼로를 도도하게 켜다가 “그분들의 성함은 ‘갑돌이와 갑순이’”라고 하자 폭소가 터져 나오던 개그였다. 이름에 대한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나는 그 개그가 생각날 때마다 늘 재미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온 시대에 따라 선호하던 이름이 있다. 부모가 한번 정해 호적에 올린 이름은 2005년 대법원 판결 이전에는 싫건 좋건 개명 신청조차 불가능했었다. 사주팔자와 점치는 것을 좋아하시던 엄마 때문에 가끔 유명 무속인들이 우리 집을 드나들곤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의 장애가 잘못된 이름에 기인한다는 주장을 했다.

치맛바람 정도가 아니라 치마폭풍이라도 마지않던 엄마는 딸의 장애를 지워주고자 나라에서 허락지 않았던 개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엄마는 사방팔방으로 알아보다가 열심히 시주도 하시고 주기적으로 치성을 드리러 다니던 절에서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호적이 없이 지내던 꼬마스님을 소개받았다. 엄마는 그 꼬마스님에게 입양 아닌 입양을 하듯이 내 호적을 넘겨주었고 나는 그 일년 뒤에 지금의 새 이름으로 호적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삼천석의 공양미를 내듯이 주지스님과의 언약으로 내 호적과 사주를 갖게 된 그 꼬마스님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가끔씩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몸이 많이 아프던 어린 시절에 나는 그 절의 사랑채에 머무른 기억이 있다. 엄마와 떨어져 적막한 절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심심해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고 울며 무료함을 채우곤 했었다. 어느 날 꼬마스님이 방문을 살포시 열고 나가자 손짓을 하며 내 손을 잡아끌고 뒷산에 있는 조그만 폭포위로 안내했다. 아직 자신도 어린애인 꼬마스님은 고사리 같은 손에 밧줄을 잡고 폭포 위에 있는 가장 큰 소나무에 기어 올라가 그네를 묶고 내려왔다. 외로움에 상했던 마음이 사라지도록 등을 밀어 그네를 태워주던 꼬마스님의 손길은 지금도 맘속에 따뜻함으로 남아있다.

그 후 난 그를 본적이 없다. 미신이라 치부해도 되겠지만 내 장애를 치유하기 위한 의식을 통해 내 사주를 짊어지는 저편의 내가 되어주었던 그 꼬마스님에게 나는 뭔가 마음에 빚을 지고 있는 듯하고 운명의 인연이듯 느껴지기도 한다.

반항기의 최고점을 찍던 청소년기에 나는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엄마의 노력이 얼마나 비효과적인지 사실을 들이대며 논리로 맞섰고 그로 인해 엄마와는 감정적으로 점점 멀어졌었다. 그후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장애자녀를 가진 많은 부모들을 만나며 맹목적으로 보여도 진심으로 자녀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충분히 되면서도 가슴속에 뭉쳐있는 아릿한 감정은 뭘까?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으로 헌신하는 고귀한 부모의 사랑이 나의 이성적 판단에 닿아있다면 다른 비장애 형제와 똑같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장애 자녀의 입장에서는 부모를 ‘장애라는 장애’에 빼앗기고 홀로 느껴야 했던 외로움이 이성적 이해로 감싸지지 않는 아릿함인 것 같다. 부모의 헌신이 소중한 입장만큼 평범한 사람으로 먼저 봐주기를 원하는 자녀의 입장도 똑같이 중요하다.

<김효선 칼스테이트LA 특수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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