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잔인한 2월’가고 수퍼 화요일

2020-03-03 (화) 권정희 논설위원
크게 작게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유명한 시구가 있지만 민주당에게는 지난 2월이 잔인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 ”고 엘리엇의 장편 시 ‘황무지’는 시작된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당선 후 민주당은 목 빠지게 4년을 기다렸다. 이전 대통령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트럼프의 독특한 카리스마 혹은 막무가내 전횡 앞에서 2020 대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트럼프를 백악관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민주당은 하나가 되었고, 덕분에 20여명 정치인들이 경선장에 뛰어들었다. ‘투표할 사람보다 후보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2019년이 저물면서 대부분 출마자들은 치열한 각축의 기세에 밀려 전장을 떠났지만 여전히 남은 후보는 진보(샌더스, 워런) 2명, 중도(바이든, 부티지지, 클로버샤, 블룸버그, 스타이어) 6명 등 8명. 선두주자를 점칠 수 없는 혼전양상 속에서 민주당 대선 경선은 개막되었다.


그런데 2월3일 아이오와 코커스를 시작으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2월11일), 네바다 코커스(2월22일)가 이어지면서 전통 민주당 진영은 당황했다. 누군가 두각을 나타내면 그를 전폭지원하리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민주당 큰손 기부자들에게 예비선거 결과는 잔인했다.

혼전의 동토에서 키워낸 ‘라일락’이 하필이면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이기 때문이었다. 샌더스가 민주당도 아닌 무소속인 것도 탐탁지 않은데, ‘사회주의자’ 간판 내걸고 미국 대선에서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트럼프를 이길 수 없는 후보라면 그를 막는 것이 급선무 - 뉴햄프셔 선거로 샌더스가 분명하게 뜨자 민주당 핵심 기부자들과 전략가들은 머리를 맞대었다. 그렇게 급조된 것이 ‘빅 텐트 프로젝트(the Big Tent Project)’로 목적은 샌더스 발목잡기. 며칠 사이에 모인 100만 달러 가 넘는 돈은 네바다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정치광고에 쏟아 부어졌다.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의 그럴듯한 약속. 하지만 비용은? 60조 달러”라는 내용으로 샌더스의 공약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뿌리자는 의도였다. 그럼에도 22일 네바다에서 샌더스가 우승하자 기부금은 더 밀려들어 300만 달러에 육박했다.

민주당 입맛에 맞는 중도 후보들이 너무 여럿이니 기부금은 사분오열 분산되고, 유권자들은 누구를 고를지 몰라 혼란스럽고 … 민주당으로서는 애가 타는 잔인한 2월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29일의 사우스캐롤라이나 프라이머리. 오바마의 추억과 백악관 탈환의 욕망이 뒤섞이면서, 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 것인가 - 마침내 민주당 주류가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흑인 유권자들의 대대적 지지로 조 바이든이 압승, 기사회생했다.

이어 억만장자 톰 스타이어, 젊은 기수 피트 부티지지, 여성 유망주 에이미 클로버샤가 줄줄이 경선 중도하차 발표를 하면서 후보군은 정리되었다. 부티지지와 클로버샤가 바이든 지지 선언을 했고, 스타이어는 누가 민주당 후보가 되든지 그를 지지하겠다고 공표했다. “민주당 후보들 중 누구라도 트럼프보다는 낫기 때문”이라는 이유.

혼전의 잔인한 2월이 가고 3월이 오자 경선구도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샌더스와 바이든 양강 구도로 가닥을 잡은 가운데 수퍼 화요일이 밝았으니 민주당 유권자들의 고민은 많이 줄어들었다. 민주당 전체 대의원의 3분의 1이 걸린 14개주 경선, 유권자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투표소로 향하기를 바란다.

<권정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