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스컬럼]깨어있는 업주

2020-02-27 (목)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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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부터 미국의 많은 대기업들은 종업원들이 선거일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투표하는 시간(Time to Vote)’으로 명명된 이 캠페인은 비즈니스 커뮤니티가 자발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초당적 운동이다. 현재 이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들은 350개가 넘는다. 1년 여 전 150여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급속히 늘고 있는 추세라 할 수 있다.

캠페인 참여 기업들은 종업원들에게 투표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면서 동시에 임금을 신경 쓰지 않고 투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미국의 투표율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당장의 생계와 생업 때문에 투표에 신경 쓸 여유를 갖기 힘든 근로자들의 형편이 한몫 하고 있음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것이 이 캠페인의 취지다.

이를 위해 기업들이 취하는 조치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초기부터 가장 적극적으로 이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파타고니아는 아예 전국적 선거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또 청바지 업체인 리바이스의 경우에는 본사직원은 5시간, 매장 직원들에게는 3시간의 투표시간을 유급으로 허용하고 있다. 차량공유업체인 리프트는 투표 당일 투표장에 가기 위해 자사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권자들에게 할인혜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캠페인 참여기업인 라 콜롬브의 경영자 토드 카마이클은 “모든 시민이 투표라는 특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CEO들의 집단적인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한다.


민간부문에서 기업들이 신성한 참정권의 행사를 적극 돕고 있다면 많은 주정부들은 종업원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고 근무일에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투표시간을 보장해 주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50개 주 가운데 이 의무규정을 갖고 있는 주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30개 주이다. 미시간, 뉴저지, 버지니아, 메인 등 20개주는 이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주법이 정하고 있는 투표를 위한 ‘타임오프’는 2시간이다. 이 2시간을 투표를 위한 유급 휴식시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예비선거가 실시되는 3월 3일에도 물론 이 규정이 적용된다.

미국은 연방법으로 투표 타임오프를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캐나다는 전국적으로 3시간의 타임오프를 주는 법을 시행하고 있다. 운송업 등 극히 일부 경우만 제외하곤 모든 업주들이 적용 받으며 어길 시에는 최고 2,000달러 벌금이나 3개월 실형의 처벌을 받는다.

기업들과 정부들이 근로자들에게 유급 투표시간을 주면서까지 이처럼 적극적으로 투표율 제고에 나서고 있는 것은 낮은 투표율로 위협받고 있는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사람들이 투표할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냥 더 잘 작동한다”는 파타고니아 CEO 로즈 마카리오의 말 속에 투표참여가 왜 중요한지가 잘 함축돼 있다.

캘리포니아가 유급 투표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고는 해도 종업원들 입장에서는 업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눈치 줄 게 아니라 종업원들이 마음 편히 투표장에 갈 수 있도록 업주가 먼저 투표를 권유하고 배려해 주면 어떨까. ‘Time to Vote’ 참여 기업 CEO들처럼 말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이런 깨어있는 한인업주들을 많이 보게 됐으면 한다. 종업원들이 투표라는 신성한 행위와 몇 시간의 임금 사이에서 선택이 어려워 갈등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민주시민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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