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이고 야생적인 낙원을 꿈꾸며 자연의 빛에 따른 색체 변화를 펼쳐 놓은 폴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1897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에서 고독과 빈곤, 지병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의 서사를 화폭에 담은 미술사상 가장 철학적인 작품이다. 우리는 두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세계와 인간이 만들지 않은 자연의 세계이다. 고갱은 문명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그가 파리를 떠나기 전 “나는 평화 속에 존재하기 위해 문명의 손길로부터 나 자신을 자유롭게 지키기 위해 타히티로 떠난다"라고 했다. 그는 문명사회를 버렸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욕망을 충족시키고 목적을 추구하고 가치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무엇을 해야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치관이라 말한다. 인생의 갈림길은 욕망·목적·가치에 따라 저마다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고갱처럼 인간 자신이 선택하고 주체적인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생과 사의 운명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인간의 이성은 삶과 죽음에 대해 물리치려고 해도 물리칠 수가 없고 해답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쳐 괴로워하는 운명을 지녔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고민이다. 특히, 삶과 달리 끊임없이 엄습하는 죽음의 문제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에 반한 가장 큰 고뇌이면서 동시에 고통이다.
인간은 누구든 영원한 삶을 갈망한다. 이는 삶에 대한 가련한 집착이면서 죽음에 대한 애절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삶에 애착을 가진 사람에게 죽음은 숙명이며, 삶이 고통이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해방이다. 숙명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다면 삶을 한탄하고 저주하게 된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죽는다면 현재의 삶을 기만하고 속일 수 있다. 결국 저주와 기만은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삶이 숙명이나 해방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현재의 기억을 통해서 존재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현재의 희망을 통해서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를 있는 현재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세상은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잠시 머무는 손님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잠깐 동안 맡겨진 선물이다. 선물에 대한 태도는 감사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 삶을 받아들여라. 삶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죽음을 초월하는 단초이다. 삶을 선물로 여기면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현재는 찰나의 시간이다. 감사와 사랑만이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할 수 있다. 인생에서 헛된 신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자. 종교란 소원에 불과하며 환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혼란은 인간이 산출한 모든 괴이한 관념에 기인한다.
교회에 나와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가고 불신하면 지옥에 간다는 영성 교리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이다. 그 뿌리는 플라톤 이데아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에서 파생되었다. 플라톤 철학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데아(idea)이다. “이성은 본래 영혼으로부터 왔다. 현상 세계는 허상에 불과하다. 이것으로부터 탈출해야 참된 이데아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중세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곡’에서 “인간의 본질은 사랑이다. 덕행이나 악행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문제다. 진실한 사랑이 인간을 고귀하게 하고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과 육을 분리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을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자신을 망치고 부정하며 삶을 낭비하려 든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고통을 이겨내는 생의 움직임이 생명의 본질이다. 영혼이 신체에서 쫓겨나기 전에 인생을 감사하게 여기며 사랑하자.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정신이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듯이 육체가 없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
칸트는 1762년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형이상학의 싸움터로 나간다. 증명되지 않을 것 같은, 아니 증명할 수 없는 사변을 청소해 버리기 위해서이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존재론은 철학으로 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초경험적 세계는 인간은 발언할 자격이 없다. 이유는 인간의 인식은 눈에 보이는 경험적 세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의 출발은 이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인식의 출발은 로크로부터 시작해 인식의 완성은 칸트로 귀결된다.
당신의 삶은 여전히 살아있고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여전히 우리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동안 인생은 즐거움이 있다. 그래서 가장 쉬운 언어로 가장 깊은 사랑을 온몸으로 깨우쳐 준 예수는 늘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의 가르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활·승천·재림같은 미래의 허상에 현혹되어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프라타고라스는 “모든 것이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는 것은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존재는 있는 그대로 이다.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우연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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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