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

2020-02-24 (월) 최진희 펜실베니아 주립대 성인교육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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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는 16명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매일 중급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하루는 한 학생이 찾아왔다. “선생님, 한국어를 더 잘하고 싶어요.” 학생은 글썽이는 눈망울로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 모습은 매일 영어로 고군분투하는 나와 나의 간절한 마음과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학생의 눈에 비춰지는 내 모습이나 혹은 커리큘럼의 내용만 쫓아가기를 멈췄다. 학생의 눈에 나를 담아 학생의 속도에 맞추어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학생들을 관찰하고 강약을 조절하고 모르면 반복했다. 16명의 학생은 타인이 아니었다. 외국어로 고통받는 내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또 다른 모습의 나를 가르쳤다.

“선생님 긴장하지 마세요.” 볼이 통통하고 귀여운 한 여학생은 나를 볼 때마다 종종 주머니에서 초콜릿과 사탕을 꺼내줬다. 그 모습 속에서 석사 시절 좋아하던 교수님께 귀여운 스티커와 공책을 챙겨드렸던 내 마음이 떠올랐다. “진희는 마음이 상냥하구나.” 교수님은 본인의 삭막했던 유학시절을 떠올리며 작은 선물에 무척 기뻐하셨다. 그리고 “진희는 내 친구야”라며 승진시켜주셨다.


이제 선생이 된 나는 내 작은 학생이 준 체리 맛 사탕을 입에 물고 그 교수님의 미소를 떠올린다. 사탕의 달콤한 맛은 교수님을 격려하던 내 마음과, 작은 표현에도 고마워했던 교수님의 소박한 웃음을 이어주었다.

심각한 건 아이들의 글 속에 역력한 내 글의 흔적이다. 빨간꽃이 잔뜩 핀 학생들의 글은 마치 내 졸업논문의 얼굴 같았다. 문장과 문장이 분리된 글, 주제가 엉뚱하게 표현된 글, 굳이 어려운 주제를 담기 위해 부득불 노력한 작문들. 어쩜 모두가 내 글 같을까….
학생들의 글을 읽고 “대체 무슨 말을 쓰고 싶었던 걸까?” 그 의도를 추적하며 질문했다. 학생들의 글 속에 매일 작문으로 고군분투하는 내가 보였다. “너도 남의 나라 말로 참 고생한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암호 수준의 난해한 문장을 해독하다보니 나의 글을 접한 지도교수님들, 라이팅 튜터들의 당혹감이 보였다. 내 글에 RFC(Revision for Clarity)를 무수히 남긴 지도교수님. 나의 엉터리 영어를 읽느라 고생했던 모든 선생님들에게 무척 부끄럽고 미안했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나는 몇몇 교수님들께 감사의 이메일을 보냈다. “오늘은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나는 학부 때부터 질문을 많이 해서 어떤 선생님에게는 문제아였고, 개념 없는 아이였으며, 문법을 가르쳐도 도통 개선되지 않는 게으른 학생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에 와서는 가끔 아프다는 핑계로 수업을 빠진 적도 있고 툭하면 교수님들 오피스에 찾아가서 놀고 수업 외 수다를 떨었다. 그런 내 모습에서 학생이 질문이 많거나, 불만의 눈빛으로 나를 삐딱하게 보거나, 혹은 늦거나 결석을 할 때조차도, 그냥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는 알지 못했던 나로 인해 당혹스러웠을 선생님들의 마음, 짜증나거나 반가워해준 마음, 그리고 조용히 품어주었던 선생님들의 마음이 보였다. 나의 온갖 질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혹은 품어준 그 마음들을 이제는 내가 가르치며 다시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수업을 통해 지금 이 자리가 나 혼자 선 자리가 아니고 무수한 선생님들의 마음과 손의 수고가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치고, 두들겨 깨우고, 섬세한 세공으로 보듬어주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 뭉클하게 감사했다. 그리고 나 또한 이 학생들에게는 많은 선생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솔직히 마음은 가벼워졌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하면 16명의 마음에 배움이 생명력을 갖고 움트고 싹 틔우고 쑥쑥 자라게 할까, 내 손을 떠난 이후의 학생들의 성장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가르친다는 건 배우는 것이고 또 언제 꽃 피울지 모르는 민들레 홑씨를 매일 조용히 바람결에 불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제나 나를 키운 반가운 마음을 만나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다.

<최진희 펜실베니아 주립대 성인교육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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