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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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가족들

2020-02-21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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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반공’은 다른 나라들과는 결이 다르다. 반공주의란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 사상의 영역이다. 하지만 북쪽 공산국가를 적으로 수십 년 대립해온 한국에서 반공은 사상 이전에 감정이다. 논리적 비판이나 선택의 과정 없이 그것은 국가정체성이자 국시이며 윤리적 올바름으로 우리는 교육 받았다. ‘반공’은 뇌리에 박히고 가슴에 박혔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거치며 한반도 분위기는 바뀌었다. 남북의 정상이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이따금 화해의 바람이 불기도 하고 다시 얼어붙기도 한다. 그러면서 국민적 결속의 요체였던 ‘반공’은 진화했다. 진보와 보수를 본능적으로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선거에서 반공 카드가 나오면 유권자들은 열렬한 지지이거나 냉소로 갈린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에는 ‘가족가치관(Family Values)’이라는 카드가 있다. 가족의 정의를 얼마나 확장하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 민주와 공화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전통적으로 가족가치의 시각적 이미지는 결혼한 남녀 즉 부부와 아이들, 애완견 한두 마리 - 새파란 잔디밭에서 아이들은 뛰놀고 강아지들은 신이 나서 쫓아다니며 부부는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평화로운 정경. 행복한 가정의 상징이자 사회의 탄탄한 기초로 인식된다.

이미지 밑에 존재하는 것은 기독교적 가치관이다. 사랑과 배려, 정직, 근면 등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하고 실천하며 그에 맞게 자녀들을 훈육하고 신앙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가치관을 가진 가족들이 저녁이면 식탁에 둘러앉아 감사기도를 하고 같이 빵을 떼는 것이 미국의 전통적 가정 문화였다.

그리고 그런 전통에 부합하는 이상적 가정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는 것 또한 미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존 F. 케네디, 지미 카터 등 대통령 가족들의 백악관 생활은 어린 자녀가 있어서 더 더욱 한 폭의 그림이었다.

백악관 가족들의 이런 전통적 모습은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까. 2020 대선이 진행되면서 일각에서 떠오르는 관심이다. 사회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니 그 변화가 백악관 가족들에게도 반영되리라는 예상은 합리적이다. 사실 이번 대선 도전자들 중 초혼의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 가정을 가진 후보는 에이미 클로버샤가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이혼/사별 후 재혼했다.

향후 백악관 가족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것은 극우 방송진행자 러시 림보의 동성애 혐오발언이었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인 그는 민주당 경선후보인 피트 부티지지를 대놓고 조롱했다. 부티지지가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경선에서 선전했다 하더라도 본선에 나가면 승산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무대에서 남편에게 키스하는 37살짜리 동성애자가 ‘진짜 남자’ 트럼프 옆에 서면 어떻게 보이겠느냐, 미국은 아직 동성애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부티지지는 “림보나 트럼프 지지자 같은 부류로부터 가족가치관 설교를 들을 생각은 없다”고 즉각 맞받아쳤다. “미국은 전진했다, 모두를 받아들이는 소속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혼 3번 결혼 4번(트럼프는 이혼 2번 결혼 3번) 전력의 림보가 가족가치 설교 적임자는 아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가족가치’는 공화당의 카드이다. 한국에서 ‘반공’이 보수결집 카드이듯, 미국에서는 ‘가족가치’가 보수를 결집시킨다. ‘가족가치’는 기독교 백인 중산층의 향수를 자극하며 주인의식을 건드리는 암호 같은 메시지이다.


‘미국이 이렇게 변해도 되는 건가, 그렇게 둘 순 없지’ 하는 자극. 기독교 백인 중심에 저촉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일종의 문화전쟁이다.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슬로건 이면에 담긴 메시지와 통하고, 트럼프라는 독특한 대통령 탄생에도 기여했다.

2009년 1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피부색의 가족이 백악관 주인이 되자 극우진영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미국의 정체성이 무너진 듯한 충격은 적개심과 분노로 폭발했다. 오바마는 미국 태생이 아니라는 가짜뉴스가 재임 8년 내내 확대재생산 되었고 여기에는 트럼프와 림보의 공헌이 컸다. 그 과실을 트럼프가 챙긴 것이 지난 대선이었다.

백악관에 유색인종을 넘어 동성애자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개연성에 극우보수 진영은 대단히 예민하다. 지난해부터 부티지지 캠페인을 쫓아다니며 방해하는 열성 시위꾼들도 있다.

이래저래 민주당의 고민은 깊다. 누가 트럼프를 밀어내고 백악관의 주인이 될 것인가. 경선 선두주자 샌더스는 보통의 미국인들 보기에 너무 좌편향이고, 중도와 유색인종에 어필할 바이든은 경선에서 뜨지를 못하고, 억만장자 블룸버그는 민주당 토박이들이 반대하고, 워런과 클로버샤는 여성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70대 후보들 사이에서 젊고 똑똑한, 그래서 빛나야할 부티지지는 동성애가 발목을 잡고 있다.

올해 백악관 주인은 바뀔 것인가, 어떤 가족이 들어갈 건가. 이제 겨우 2월 - 오리무중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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