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크루즈 여행

2020-02-18 (화)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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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면 하고 싶은 것?”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 중의 하나가 크루즈 여행이다. “버킷 리스트?”- 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크루즈 여행이다. 낭만의 크루즈, 환상의 크루즈라는 홍보용 멘트에 너무 세뇌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크루즈 여행은 하고 싶다고 단번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리스트’에 오를 만하다.

크루즈 여행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주말 낀 며칠간의 단거리 크루즈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맛보기일 뿐. 보통 ‘크루즈 여행~’ 하면 떠오르는 것은 호화로운 선상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을 하고, 최고급 음식을 먹고, 원 없이 와인을 마시고, 밤늦도록 댄스파티를 즐기며, 아침이면 매일 새로운 도시에서 관광을 하는 특별한 날들의 연속이다.

이제껏 누려보지 못한 여유로움을 마음껏 누려보는 호사의 기회로 최소한 수천 달러의 돈과 수주의 시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평생 일에 묻혀 살아온 한인들 역시 은퇴하고 나면 일단 하고 보는 일 중의 하나가 호화 크루즈 여행이다.


‘낭만’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던 크루즈에 ‘악몽’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 환자가 크루즈 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에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면서 ‘지옥의 크루즈 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현재 요코하마 항에 정박 격리되어 있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호에는 3,700명 정도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타고 있었는데, 감염자가 매일 수십명씩 증가, 17일 현재 450여명으로 늘었다. 이제까지 1,720여명이 검사를 받았으니 검사자 4명 중 한 명꼴로 확진 판정을 받은 셈이다.

바이러스 잠복기 14일 동안 꼼짝 없이 해상 격리된 승객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불안, 순간순간이 공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 승객들 감염 사실이 확인된 크루즈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가 유일하지만 파장은 글로벌 업계 전체로 퍼지고 있다. 바이러스 공포에 항만들이 크루즈 선의 정박을 거부하면서 며칠 씩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녀야 했던 케이스, 홍콩서 3,800여명 승객들 전원이 검사를 받느라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격리된 후 4일 후에야 하선한 케이스 등의 보도들, 그리고 이런 저런 소문들이 크루즈 불안심리를 촉발한 결과이다.

게다가 연초인 지금은 크루즈 업계의 ‘웨이브(wave)’ 시즌. 올 1년 크루즈 여행 예약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시기이다. 하필 이런 때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면서 예약이 얼어붙었다. 그와는 별도로 크루즈 업계는 아시아 노선 운항을 일단 4월말까지 중단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로 인한 재정적 손실만도 엄청나다. 전 세계 최대 크루즈 회사인 카니발 사의 경우 관련 손실을 4억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크루즈 업계는 각종 재난사태와 나쁜 평판을 꿋꿋하게 이겨낸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2년에는 이탈리아 해안에서 크루즈 선이 좌초해 32명이 사망했고, 2013년에는 선상 화재로 배관시설이 망가져 크루즈 전체가 거대한 화장실이었던 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노로바이러스가 퍼져 350명이 감염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크루즈를 즐기는 승객들은 변함없이 돌아왔다는 것. 그러니 이번 바이러스 사태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이 업계의 기대이다. 건망증의 긍정적 효과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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