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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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얼마나 두려워할 것인가

2020-02-07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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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3일 베르사유. 1차 대전을 끝내는 강화조약 회의 중 우드로 윌슨 미국대통령이 쓰러졌다.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고 심한 혼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후 그가 처음의 원칙들을 버리면서 평화협정은 엉망이 되었다는 평가이다.

그의 혼란 증상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렸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가벼운 뇌졸중으로 해석했다. 뇌졸중이 갑작스런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화씨 103도의 고열에 격렬한 기침발작, 설사 등이 동반되었다. 뇌졸중과는 상관이 없는 증상들이다.

그래서 정설로 굳어진 것이 독감이다. 그즈음 파리에는 독감이 돌고 있었고, 그의 젊은 보좌관도 독감으로 사망했다. 윌슨이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은 높았다. 인류역사상 가장 인명피해가 컸던 병, ‘스페인 독감’이 유행 중이었다.


이 병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단 15개월 지속되었지만 사망자가 무려 5,000만명에서 1억명으로 추산되었다. 미국에서만 67만명이 사망했다. 병을 이렇게 키운 데는 미국의 1차 대전 참전, 그리고 윌슨 행정부의 보도관제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시로서는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발원지는 미국이었다. 캔사스, 해스켈 카운티에서 1918년 1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역주민들이 거의 모두 폐렴 등으로 아팠다.

해스켈 카운티는 철새 이동통로이자 당시 가축 농장지대였다.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인간 바이러스가 돼지에 감염되면서 치명적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오늘날 과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전시 모병정책에 따라 지역 청년들은 군 주둔지로 가서 훈련을 받았고, 훈련소 사병들은 미국의 타 지역 군부대들로 배치되고, 프랑스로 파병되고, 타국 군인들과 섞이는 동안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윌슨 행정부는 전시 국민단합을 해치거나 사기를 떨어트리는 보도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언론도 보건당국도 병에 관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진상은 병이 스페인으로 번져 스페인 국왕이 독감에 걸리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달리 스페인은 참전국이 아니어서 보도검열이 없었다. 스페인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페인 독감’은 국가가 진실을 은폐하면 얼마나 엄청난 희생이 따를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사람들은 병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할 두려움을 갖지 못해 무방비로 감염되었다.

그 비슷한 일이 중국에서 벌어졌다. 12월 우한에서 환자들이 발생했을 때 쉬쉬하며 덮은 무책임한 초기대응이 상상도 못할 상황을 만들어냈다. 사회적 경제적 활동들이 전면 중단되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는 동면기를 맞았다. 세계의 공장이 멈추니 여파는 국경을 넘고 대륙을 넘는다.


발병 초기 정부당국의 은폐로 중국인들이 무방비였다면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과도한 방어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달 29일 호주 시드니의 한 중국식당 앞에서는 60세 남성이 심장정지로 사망했다. 누군가 CPR만 하면 살릴 수 있었는데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코로나바이러스가 두려워 거부했다고 한다. 남성이 최근 중국에 다녀왔는지, 혹은 중국인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과민반응을 보면서 컬럼비아 대학 메디컬센터 응급의학과의 크레이그 스펜서 소장은 착잡하다. 에볼라가 창궐하던 2014년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자원봉사 의사로 환자들을 돌보았던 그는 뉴욕으로 돌아온 후 에볼라 진단을 받았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 지하철을 탔고 볼링장에도 갔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서아프리카에서 무모하게 뉴욕으로 날아오다니, 너무나 이기적”이라고 당시 일반시민 도널드 트럼프는 트윗을 날렸었다.

미국에서 에볼라 확진자는 10명에 불과했지만 에볼라(Ebola) 아닌 두려움볼라(fearbola)가 상당기간 미국을 사로잡았다. 이번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역시 같은 현상을 빚고 있다.

‘위험 인식’ 오류의 문제라고 오리건 대학의 폴 슬로빅 박사는 말한다. 에볼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등 ‘낯선 위험’에 대해서는 실제로 닥칠 가능성이 극히 낮아도 과도하게 두려워하고, 독감 등 ‘익숙한 위험’에 대해서는 위험도가 훨씬 높은데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독감 사망자는 지난해 10월 이후 이미 1만명에 육박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독감 예방접종에 관심도 없다. 잘 아는 병이라는 것이다. 반면 확진자 12명에 불과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지나쳐 중국인/아시안 기피현상까지 일고 있다.

무엇을 얼마나 두려워할 것인가. 두려움 앞에서 이성적일 필요가 있다. 고양이 앞에서 호랑이 본 듯 겁에 질린다면 우습지/슬프지 않은가. 불안 두려움 걱정도 적정량이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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