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의 오후
2020-02-05 (수)
윤영순 / 우드스톡, MD
소소한 일상이지만 가끔은 미소 짓게 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삶에 묘미를 더한다. 집 앞 여기저기에 다람쥐들이 아슬아슬하게 그네타기를 즐기는지, 바람에 출렁이는 깡마른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잽싸게 공중을 날아 착지하는 모습을 보며 동물의 세계에서 본 원숭이가 떠올라 떨어질세라 쓸데없는 조바심을 해 본다.
먹이를 찾아 베란다에 날아 온 참새들 속에 귀한 붉은 머리 딱따구리 한 마리도 끼어 있다. 며칠 전부터 하루 두 번씩 흰쌀을 접시에 담아두고 새들을 관찰하는데, 벌써 눈치를 챈 녀석들이 후루룩 날아온다. 그 중에도 서열이 있는지 한 녀석이 독식하는 사이에 다른 녀석들은 멀찌감치 접근도 못하고 서성거리는 모양새가 안쓰러워 주위에 쌀알 몇 개 더 흩뿌려 두었다. 몸집이 작은 녀석이 겨우 몇 알 주워 먹고 달아난다. 그들만의 질서를 위한 엄격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누가 탓하랴.
겨울은 한가로움을 즐기게 하는 계절인 듯싶다. 앉아 있기에는 좀이 쑤시는 청명한 날씨라 가까운 공원으로 나가보니 봄부터 치열하게 생명을 부지해 오던 동식물의 생태계가 휴식에 들어가 지금 한겨울을 나고 있다. 숲은 온통 벌거벗은 나무와 바삭거리는 낙엽뿐, 여름 내내 병풍처럼 푸른 나뭇잎들로 가려져 있던 시야가 확 트이며 숲속은 여지없이 속살을 드러내 보인다. 널브러져 있는 잔가지들이 그나마 다람쥐들의 놀이터가 되고 동물들의 목을 적셔 주었을 옹달샘이 지금은 새들의 쉼터가 되어있다.
이 공원 한 가운데는 살아 숨 쉬는 작은 풀포기 하나라도 끌어안고 젖을 주는 엄마의 젖줄 마냥 사시사철 넓고 푸른 물이 기슭까지 넘쳐흐른다. 물 가까이 다가가니 이미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진 청둥오리 떼가 먹이를 쫓아 뒤뚱뒤뚱 주둥이를 들이대는 모양새며, 몇 마리는 누가 던진 먹다 남은 사과를 가지고 물속에 들어갔다 올라왔다, 쪼아 먹다말다 공놀이하듯 놀고 있다. 족히 수백 마리가 넘는 살찐 거위 떼가 영역을 지키느라 집단을 이루며 서로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그 어마어마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가관이다.
젊음을 자랑하듯 반바지 차림의 청년이 손 사인를 하며 자전거를 타고 우리 곁을 지나간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달리는 씩씩한 젊은 엄마들, 크고 작은 개를 데리고 나온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 겨울이 겨울 같지 않는 날씨에 호숫가 벚나무가 봄날인양 작은 꽃망울을 달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발길을 멈춘다.
한가롭게 공원을 한 바퀴 산책하다 호젓한 벤치에 앉아 보니 아일랜드 시인 올리버 골드. 스미스의 “희망”이란 시 한 구절이 돌에 새겨져 있다. “희망이란 꺼져가는 촛불 같지만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고, 밤이 깊어 어둠이 짙어질수록 촛불은 더 영롱한 빛을 발한다.” 그는 아일랜드를 무자비하게 수탈하였던 영국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며 싸웠던 시인이다. 한때 암울한 일본 식민지시대를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마음에 와 닫는 시 구절이다.
이처럼 공원이라는 한 공간 속에는 의외로 쉬며 생각하게 하는 조용한 쉼터가 있기에 누구나 바쁜 와중에서도 몸과 마음을 충전시킬 수 있는 이 공원을 즐겨 찾는가 보다. 짧은 겨울날 오후가 어느덧 노을빛에 젖어들기 시작하는 공원을 뒤로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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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