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글쓰기는 00이다. 왜냐하면…” 영어 글쓰기 수업을 할 때 매 학기 시작마다 학생들에게 이 문장을 주고 완성해 보는 글쓰기 활동을 한다. 종이를 넉넉하게 주고, 그림을 그려도 좋으니 마음대로 써보라는 말도 덧붙인다.
답을 걷어보면 가지각색이다. “영어 글쓰기는 피라미드 쌓기다. 기초부터 단단하게 쌓아야하기 때문이다” 같은 교과서적인 답도 있고, “영어 글쓰기는 오래된 책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모르겠다”처럼 자신 없는 답이 나오기도 한다.
솔직한 학생은 악마가 삼지창을 들고 쫓아오는 그림을 그려놓고 “영어 글쓰기는 악마다. 날 항상 괴롭히는 무서운 존재다”라고 써놓기도 하고, 창의적이고 기발한 학생은 “영어 글쓰기는 물이 반만 차있는 컵이다. 데이터, 아이디어는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문법, 의견, 구조, 증거 등을 사용해서 나머지 반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처럼 독특한 비유를 쓰기도 한다.
이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영어 글쓰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파악한다. 이번 학기에 유독 히말라야 산, 악마, 레슬링, 외계어 등에 비유한 학생이 많다면 아무래도 수업의 난이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신호다. 아메리카노, 해외여행, 빌딩, 퍼즐 등 재미있는 비유가 많다면 글쓰기에 부담이 크지 않은 학생들이 많다는 거니까 좀 더 지적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활동을 준비한다.
학기가 끝나기 직전에 위의 활동지를 다시 나눠준다. “16주 전에 여러분이 이렇게 답했다는 거 기억하세요?”하고 물어보면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자신의 필체로 적힌 글을 보고 나서야 기억해낸다. 잠깐 훑어볼 시간을 준 후, 새 활동지를 나눠준다. “오늘은 수업의 마지막 날이죠. 오늘은 수업 첫날 했던 것과 같은 걸 할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께 영어 글쓰기는 무엇인가요?”
학기 초에 “피라미드 쌓기”라고 말한 친구는 ‘나무’의 비유를 들었다.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빛, 토양, 양분 등 기본적인 요소가 필요한데 영어 글쓰기도 문법, 어휘, 구조 같은 기본기가 중요하고, 기본이 잘 쌓였다면 나무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물이 반만 차 있는 컵”이라고 했던 학생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의 비유를 썼다. 밤하늘에는 수억 개의 별이 있듯이 아이디어도 수억 개가 있지만, 별자리를 만들 때 특정한 순서를 따르는 것처럼 아이디어를 글의 형식에 맞게 짜내면 좋은 글이 된다고 한다.
학기 초와 학기 말 비유를 대조해서 읽어보면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일궈낸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피라미드와 나무 비유를 썼던 친구는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학기초와 학기말 모두 같은데, 피라미드와 달리 나무는 성장한다는 점을 강조해서 써놓은 걸 보아 자신의 잠재력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물이 반 차 있는 컵과 밤하늘의 비유를 쓴 학생 역시 데이터나 아이디어는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한 건 학기초와 학기말이 유사하지만, 반 이상을 담으면 넘쳐버리는 물 컵과 달리 밤하늘의 별자리는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수업에서 다루었던 게 별자리 같은 글을 여럿 써내는데 도움이 되었나 보다.
학생들의 비유를 읽어보며 나는 한 학기 동안 어떤 성장을 했나 톺아본다. 학기초와 학기말의 나는 어떻게 성장했는지. 2019년과 2020년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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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