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하면 수억 마리가 전 속력으로 헤엄쳐 올라가야 하는 경주다. 자기키보다 3,000배나 긴 장장 17.5cm, 곳곳에 장애물이 널려있는 그 길을 목숨 걸고 질주해야 한다. 그중 단 한마리만이 사랑하는 임을 만나 승리의 월계관을 낚아챈다.
사랑하는 임의 길도 쉽지는 않다. 주머니(난소)에서 튀어나오면 넓은 들판(복강)을 거쳐 입구가 나팔처럼 생긴 관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끔 길을 잘못 들어 삼천포로 빠지기도 한다. 일단 나팔관 안에 들어가도 녀석(정자)들이 난자를 찾기는 힘들다. 불임증이 15%나 되는 이유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기적의 산물이다. 그러니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아들을 둔 30대 중반의 전문직 여성이었다. 술, 마약중독의 아버지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버렸다. 자기를 키우기 위해 힘들게 일하는 어머니 밑에서 항상 긴장 속에서 자랐다. 가끔 아버지가 떠난 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항상 어머니를 돕는 착한 아이로 알려졌다. 가끔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도 어머니를 도우려고 참석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점점 생일파티 등에 부르지 않자 자신이 남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대학 때 사귄 두 남자 사이에서 각각 아들 하나씩을 낳았다. 두 남자 모두 술, 마약에 여자 스커트만 쫓는 루저였지만 그들에게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떠났다. 외로움 중에도 두 자식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에 매달린 끝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후 전문직을 얻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남자 만나기가 무서웠다. 자신은 물론 두 아들한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자기가 또 루저를 만날까봐 두려워 의사를 찾은 것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세상과 사랑의 관계를 이루며 대화 내용도 나, 내 것에 주로 국한된다. 이 시기에 부모가 죽거나 이혼하거나, 항상 싸우거나, 혹은 부모한테 무관심, 학대를 당하는 문제가정에서 자라면 일반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이 따른다. 그런 아이는 커서도 사랑받지 못한 정서적 욕구를 채우거나 보상 받기위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문제는 그러한 노력이 대부분 자신이 만들어놓은 허구, 상상의 세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문제가정의 부모를 닮아 가든지 아니면 부모 비슷한 상대를 추종하는 행동패턴을 보인다. 알콜 마약에 찌든 자, 바람둥이, 가정폭력 상습자, 죄수, 성범죄자 같은 사람들과 반복적으로 로맨스 관계에 빠진다. 자신의 인생이 망가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자기 인생을 걸고 그들의 못된 행동을 바꾸려고 애쓴다.
또 다른 이유는 사랑 중독이다. 무의식 속에서 못나고 못된 남자를 자기와 동일화 시켜 그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란 집착이다. 이런 심리적 기전은 타인을 돌보는데 바빠 자신의 문제점을 잊어버리거나 부정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더불어 못난 남자를 도와주고 통제하는 일은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렸을 적 불행한 환경에 너무 익숙해 자기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인식이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되고 희망 없던 남자가 자신의 정성으로 회복되면 여성은 행복감대신 불안과 좌절에 빠져 그를 떠나 다시 사랑을 줄 대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자존감을 높여 열등감을 해소해 주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열등감은 주로 어린 시절 형성되어 일생 지속되지만, 지속적인 노력과 연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사랑 중독에 빠진 여자들은 대개 겉으로는 사회적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독립성과 책임감이 매우 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아 항상 열등의식에 빠져 있다.
자존감은 나다운 나를 인정하는 내면의 정서다. 건강한 자존감은 나의 가치, 내가 지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함께 안는다. 타인의 시선과 관심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헤쳐가려는 의지가 강한 마음가짐이다. 자존감이 허약하면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이리저리 틀어지고 만다. 자신의 내면에서 사랑을 찾지 못하고 늘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충분히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인데 자기보다 못난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려는 집착을 깨닫게 도와주는 것으로 치료는 끝난다.
올해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해로 삼자. 자기 사랑은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의 사랑을 착취하는 나르시시즘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가진 그대로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고, 다듬고 보살피며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삶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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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