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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명예

2020-01-23 (목)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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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역사에 가까운 메이저리그는 무수한 스캔들로 점철돼 있다. 그중 최악의 추문으로는 단연 ‘블랙삭스 스캔들’을 꼽을 수 있다. 1919년 신시내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벌인 승부조작 사건이다. 시즌 29승을 거둔 화이트삭스의 선발투수 에디 시코티는 무기력한 투구로 대량실점을 한 후 강판 당했으며 시즌 내내 막강한 공격력을 보였던 타자들은 헛스윙을 연발했다. 낙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던 화이트삭스는 1대 9로 대패했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후 스캔들의 실상이 드러났다. 선수들 처우에 너무 인색했던 구단주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선수들이 한 도박사의 회유에 넘어가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이다. 이들이 받기로 한 돈은 총 8만 달러. 당시 최고스타의 연봉이 1만 달러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돈이다. 이듬해인 1920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시코티 등 화이트삭스 선수 8명에 대해 메이저리그에서 영구 퇴출시키는 처벌을 내렸다.

세탁비 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구단주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선수들은 빨지 않은 유니폼과 양말을 신고 경기에 출전했다. 팬들은 선수들의 더러운 양말을 보고 ‘블랙삭스’라고 놀렸다.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연루된 스캔들이 ‘블랙삭스’로 불리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메이저리그는 이후에도 승부조작, 도박, 스테로이드 등 크고 작은 스캔들로 얼룩졌다. 스테로이드 시대 이후 한동안 잠잠한 듯하던 메이저리그에 또 다시 대형 스캔들이 터졌다. 2017년 ‘월드시리즈 챔피언’인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조직적으로 상대팀 사인을 훔쳤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외야 카메라에서 상대 포수의 사인을 훔친 후 덕아웃에서 휴지통을 쳐 타자에게 어떤 공이 날아올지 알려준 것이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내 사인을 알고 있는 타자를 상대하는 게 약물을 복용한 선수를 상대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어떤 공이 들어올지 알고 있으면 안타를 만들어낼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6년 2할 4푼 7리로 전체 24위였던 애스트로스의 팀 타율이 사인 훔치기를 했던 2017년에는 전체 1위인 2할 8푼 2리로 급상승했다.

스포츠의 기본정신은 공정한 룰과 정정당당한 승부이다. 그런데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가 펼쳐진 것이다.

메이저리그는 조사를 통해 애스트로스 단장과 감독에 대한 자격정지와 500만 달러 벌금, 드래프트권 박탈 등의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자 팀은 단장과 감독을 즉각 해임했다. 그러나 연루 의혹을 받는 선수들에 대한 징계가 전혀 내려지지 않아 휴스턴은 금년에도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대형 스캔들을 일으킨 팀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애스트로스의 2017년 월드챔피언 트로피를 박탈해야 한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LA 시의회는 21일 트로피를 준우승 팀인 LA 다저스에 줘야 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박탈은 어렵다. 전례가 없는데다 선수들에 대한 추가 조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선수노조를 의식한 듯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하지만 상관없다. 많은 팬들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진정한 월드챔피언이 아니라 얼룩진 명예를 훔친 ‘루저’로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2017년 월드챔피언으로 언급될 때마다 그것은 그들에게 부끄러움과 치욕을 상기시켜주는 불편한 순간이 될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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