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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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가 그리워서

2020-01-20 (월) 백 광 / 알렉산드리아,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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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보다 물질, 인격보다 능력을 중시하는 우리 한인사회에 엉뚱하게 ‘풍류’라는 생뚱맞은 소리가 내 자신에게도 낮선 말로 느껴진다. 달보고 나갔다가 별보고 들어오는 힘든 우리 이민 생활에서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별로 들어보지도 못한 말 같기도 하다. 고국 나들이 갔다가 ‘공돌이, 공순이’란 닉네임을 달고 온 우리 한인들에겐 너무나 사치스러운 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이민역사 60년의 이 지역 교포사회에서 허리 휘는 보릿고개를 지나면서 삶 속에서 끈질기게 연명해온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감지된다.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모임,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은 우리 민족 공동체의 ‘우리스러워진다’는 멋진 삶의 유기적 작용으로 너무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초월적 자세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고 있다.
미술에서 여백의 미학을 말한다면 인생에서는 여유로움의 풍류를 생각하게 된다. 풍류는 어떤 사람이나 장소에 서려있는 독특한 기운이나 풍치, 운치다. 인생은 예술과 자연의 융합으로 인격적 가치승화다. 우리 주위에는 ‘멋 적은 친구’라는 사람도 있다. 예술의 예자도 모르고 감정이 메마르고 돈 한 푼에 바들바들 떠는 공생원이란 말이다.
풍류란 살아 있음의 축복을 받은 꽃바구니다. 여담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18번은 눈을 지그시 감고 흐느끼듯 부르는 ‘사나이 가는 길에 웃음만 있을소냐’, 김종필 씨의 18번은 ‘너와 나의 고향’ 등 나름대로 풍류의 기가 서려있었다.

또 풍류를 생각하면 ‘명동백작’의 별명을 가진 시인 박인환이 떠오른다. ‘세월이 가면’을 쓴 명동 대폿집에서 빈 호주머니에 얼굴을 붉히지 않고 선비의 호기를 부리다가 30세에 객사한 아까운 시인이었다. 그때에 나는 형사소송법을 공부하다가 골치가 아프면 가끔 들러 목을 축이고 머리를 식혔던 기억이 난다. 그의 시는 1960년대 대학생들의 애창곡이 됐다.
풍류란 어떤 이에겐 사치고 허영이지만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우리들의 일상엔 은은한 삶의 향기이고 시대를 초월하는 멋과 운치다. 고려 말의 한림별곡에는 선비의 기품이 그대로 녹아있다.
설익은 성공과 탐욕이 판치는 시대, 나와 내 가족만 눈에 들어오는 시야, 가까운 몇 사람만 가슴에 품는 좁은 가슴에 이미자의 노래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은 대한민국 문화훈장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풍류란 인간 본연의 순수성과 삶의 경이로운 가치 속에서, 삶의 끝자락에서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는 영혼 성장의 여정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내 인생의 빈 지게를 내려놓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미주가요동호회’에서 “취하고 싶네” 하고 구성진 노래를 부르러 가련다.
어제 우리 집안의 장조카인 백 목사가 은퇴를 하고 망중한을 즐기는 많은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나는 조카에게 마음을 보낸다. 세월이 보내준 은퇴가 아니고 하늘이 보내준 우등 상장으로 귀하게 여기고 수염도 길러보고 풍류를 즐기면서 또 하나의 격조 높은 인생을 살아보라고.

<백 광 / 알렉산드리아,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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