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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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방주’와 호주 대화재

2020-01-17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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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먼 옛날 이 땅에 대홍수가 있었다는 설화는 여러 문명권에서 전해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노아의 방주’이다. 인간들의 악행과 타락이 도를 넘자 창조주는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결정하고, 의로운 인간인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한다. 3층으로 된 방주에 노아의 가족들과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쌍으로 태워지고, 물바다가 된 세상에서 이들만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이다.

5개월째 불타고 있는 호주의 거대산불을 보면서 노아의 방주 속 동물들을 떠올렸다. 창조주가 굳이 동물들을 방주에 태우게 한 섭리를 헤아려본다. 대홍수나 거대산불과 같은 천재지변 앞에서 야생동물들은 지극히 무력한 존재들, 인간이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먹이사슬의 한 칸 한 칸을 이루는 이들 종 중 어느 하나에 구멍이 뚫리면 결국은 생태계 전체가 흔들리는 유기적 공동체로서 우리는 살고 있다.

미국에 살면서 호주 산불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겨울인 지금 그곳은 한창 여름인데다 거리로도 너무 멀다.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그곳의 불길을 가슴에 와 닿게 만든 것은 킁킁 대는 아기 코알라의 울음소리였다. 산불 현장 동영상 속 어린 코알라와 아기 캥거루들은 순하디 순해서 한줌의 방어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런 동물들이 떼로 죽어가고 있다.


순식간에 덮치는 불길에 타서 죽고, 연기에 질식해 죽고, 도망치다 기진해서 죽고, 용케도 불을 피했지만 잿더미 위에서 먹을 게 없어 죽는 야생동물들이 부지기수이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마다 동물들의 사체가 아득하게 널려있다.

호주는 지구상 6대륙 중 가장 건조하고 고온인 대륙이다. 여름이면 산불은 연례행사이다. 태곳적부터 주기적으로 찾아왔으니 원주민이나 야생동물들에게 산불은 유전인자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불이 나면 어찌해야 하는 지를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문제는 21세기의 산불은 이전의 산불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산불의 강도와 규모가 무섭게 커지고 있다. 특히 이번 산불은 파괴적이다. 2019년은 수십 년래 최악의 가뭄인데다 지난 연말에는 섭씨 40도가 넘는 열파가 닥쳤다. 거기에 강풍이 더해지면서 산불은 맹렬한 기세로 퍼져나갔고,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도시 전체가 초토화한 지역, 비행기나 헬리콥터 외에는 접근이 불가한 완전 고립지역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호주 6개주 전역에 걸쳐 일어난 이번 산불의 피해 면적은 대략 1,800만 에이커. 남한보다 넓고, 벨기에와 덴마크 2개국을 합친 것보다 넓은 면적이다. 지난해 지구의 허파가 불탄다고 안타까워했던 아마존 열대우림 화재 지역(1,750만 에이커)보다도 넓다. 광활한 피해지역에 비하면 인명피해는 그나마 적은 편이다. 산불 진화에 동참했던 자원봉사 소방관 등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 화재로 국제적 관심을 끈 것은 야생동물들의 피해이다. 동물들을 살리기 위해 화재현장에 목숨 걸고 달려간 지역주민들 덕분이다.

호주는 대표적인 생물다양성 국가이다. 타 지역에서 보기 어려운 토종 동물들이 수백 종에 달한다. 코알라와 캥거루가 대표적이고, 피그미 주머니쥐, 웜바트, 앵무새 종류인 카커투, 여우얼굴 박쥐 등이다. 시드니대학 생태학자들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해를 당한 야생동물은 10억 마리, 그중 절반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드니와 멜번이 속한 뉴 사우스 웨일즈(NSW) 주는 산불피해가 가장 컸다. 지역 내 서식 코알라 중 1/3이 죽었고, 코알라 서식지 중 1/3이 파괴되었다고 호주 연방환경청은 밝혔다.

산불이 밀려들 때 그 최전선에 있는 것은 야생동물들이다. 이들 특정 동물이 불타 죽으면 그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포토루라는 주머니쥐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 쥐가 사라지면 그 토양에서 자라던 특정 식물들이 자랄 수 없게 되고, 그 식물들을 먹이로 삼던 동물들 역시 멸종할 수가 있다. 생태계는 연결고리로 균형이 유지되는 시스템, 한 요소가 무너지면 파장은 전체에 미친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대한 산불, 그 환경적 재앙의 뿌리는 기후변화이다. 가뭄도 홍수도 산불도 태풍도 더위도 추위도 … 갈수록 극심해지는 것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고 기상전문가들은 못 박는다. ‘온난화’ 추세는 ‘분명하고 명백하다’고 미 항공우주국(NASA)의 기후분석 연구진은 말한다. 15일 NASA 연구진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대는 지구 역사상 가장 더웠던 10년, 2016년과 2019년은 가장 더웠던 해이다.

몇 달씩 꺼지지 않는 호주 화재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준다. 기후위기 상황이다. 인류를 지키고 동식물을 지키며 지구생태계를 지키려면 방법은 하나이다. 지구온난화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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