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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진행법

2020-01-11 (토)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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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국회에서 패스트 트랙에 올려져 있던 두 가지 법안이 통과됐다. 공직선거와 공수처 관련 법안들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은 아직 통과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법안들이 통과되는 과정 중 국회는 소위 ‘동물 국회’ 모습을 다시금 보여주었다고 한다. 나는 미국인들에게 나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종종 자랑한다. 그런데 ‘동물 국회’의 모습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여기서 패스트 트랙 법안 내용에 대해 찬반 토론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법안 내용에 대해는 서로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 대접을 받으려면 정치의 장인 국회에서의 토론과 회의 진행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번에 패스트 트랙 법안들이 통과되는 과정 중 회의 진행 절차상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무기명 투표’였다. 어느 법안에 대해 무기명 투표를 하자는 동의안이 제출된 것으로 보아 한국 국회법 상 무기명 투표가 허용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느 단체도 그 단체의 운영에 적절한 회의 진행법을 제정해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해당 단체의 특성에 맞는 특이한 진행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발언과 투표 내용은 그 무엇보다도 투명해야 한다.

임기 동안의 의정활동 평가에는 결국 해당 국회의원의 발언과 법안에 대한 의사 표현 내용이 가장 중요하고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선출직 공직자에게 무기명 투표가 허용될 수 있는 사항이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내가 20년 이상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으로 일하면서 무기명 투표가 허용되어 본 적이 없다. 안건 내용이 법적으로 비공개 토론이 허용되는 것은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안건들도 결정을 내려야할 때는 꼭 공개회의에서 어느 위원이 어떻게 투표했는지가 투명하게 드러나고 회 의록에 기록된다. 유권자들의 투표로 뽑힌 선출직 공직자들의 의사결정 과정과 내용은 이렇게 투명해야 한다.

또 하나 의아하게 느낀 부분은 수정 동의안 처리방법이었다. 공직선거법 원안(원동의안)에 대해서 수정 동의안이 제출되었고 공수처법 원안에 대해서는 수정 동의안과 재수정 동의안까지 제출되었다. 그런데 공직선거법 수정 동의안이 표결에 부쳐 통과되자 원안은 표결이 없이 지나갔다.

국회의장이 수정 동의안이 통과되었으므로 원안에 대한 표결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공수처법 처리 과정에서도 일단 재수정 동의안이 부결된 후 수정 동의안이 통과되자 원안에 대한 표결 없이 지나갔다.

분명히 이런 진행은 한국 국회법에서 허용되니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다수 단체가 사용하는 로버츠 회의 진행법(Robert’s Rules of Order)에 의하면 맞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경우 로버츠 회의 진행법 적용이 표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사를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기에 더 적절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단체에서 차 한 대 구입 논의를 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A차량을 3만달러에 구입하자는 동의안이 제출되었다.

수정 동의안도 제출되었는데 A차량 대신 B차량을 구입하자는 안이다. 가격은 그대로 두고 말이다. 표결 시 수정 동의안부터 한다. 이때 만약에 어떤 특정 회원이 차 구입은 반대하나 기왕 구입한다면 A보다는 B차량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럴 경우 그는 일단 수정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수정 동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하자. 이럴 때 로버츠 회의 진행법 아래에서는 원안 내용이 이제 ‘A차량 3만달러 구입’에서 ‘B차량 3만달러 구입’으로 수정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렇게 수정된 원안에 대해 다시 표결에 들어가게 된다. 그때 물론 이 회원은 차 구입을 반대하기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표결 참석자의 뜻이 좀 더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

로버츠 회의 진행법은 우리 한인 동포사회 단체들과 기관에서도 적용해볼 만한 좋은 회의 진행법이다.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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