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는 계절이 오면 버릇처럼 허무와 설렘의 야릇한 흥분을 느껴왔지만 왠지 올해는 사뭇 묘한 감회가 저며 온다. 나이 탓인가. 시나브로 미간이 뜨끔해질 만큼 애달픈 환각으로 끌려 들어가곤 한다.
마치 범명(梵鳴)이 애처롭게 가슴에 울려오는 것만 같다. 범명이란 무엇인가. 첩첩산중에서 한밤 중에 아주 어린 새끼 노루가 어미를 잃고 애타게 찾아 헤매는 울부짖음이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그 고독과 절망이 ‘범명’이라는 말이다. 지난 한 해도 몇 번이고 대화단절, 적막감이 범명을 울려와 심성을 흔들어 놓았었다.
더하여 나는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며 1912년 영국에서 북극을 향해 출항했던 타이타닉호를 타고 앉아 있는 전율을 지워내지 못한 채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곤 한다. 여객선이 얼마 후 거대한 빙산과 충돌하여 삽시간에 침몰되리라고는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선장과 기관사도 일기예보 경고를 묵살해 버리고 “설마, 괜찮아…”를 연발하며 고집스레 항로를 바꾸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화여행에 들뜬 승객들은 질탕한 흥취에 젖어 파멸의 순간이 들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왜 요즈음 나는 내가 그때 그 타이타닉호에 타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자주 빠져드는 건가. 이상하게도 타이타닉호의 침몰 전후 혼란과 비탄, 절망의 아우성 소리를 상상하곤 한다. 더불어 인간들의 일상 관념이 얼마나 모순되고 자만, 아집에 마취되어 있는지를 탄식한다. 선장과 선원들이 불길한 일기예보에 겸손했더라면 즉시 항로를 바꾸고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승객들 모두가 “설마, 괜찮겠지...” 그런 방심, 교만을 버리고 선장의 마음을 고쳐 먹게 했더라면 평화스런 여행을 계속하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늘의 우리가 닥쳐올 불행을 뻔히 보면서도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 당사자들처럼 교만과 환락과 방심에 젖어 파국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연말연시를 맞는 지금 이 순간도 모두의 심경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자. 우리 어떻게 살아왔나. 역사를 어떻게 써내려 왔나. 철든 사람이라면 민망한 자괴감으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성(畵聖) 미켈란젤로는 5년여 동안 사다리 위에 누워서 세계적 명화 시스틴 성당 천정벽화를 그렸다. 눈, 허리가 병든 미켈란젤로는 작품이 완성되자 사다리에서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눈부신 자연 벌판을 한동안 바라보다 다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천정벽화의 사인을 지워버렸다. “조물주는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는데 이까짓 그림 하나에 잘난 척 사인을 하다니…” 그 이후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한 일이 없다. 미켈란젤로의 겸손으로 그의 모든 작품들은 빛나고 있다.
‘겸손’은 언제 어디서나 힘을 발휘한다. 진정성을 내버리고 거짓, 기만, 저주, 증오로 세상을 일그러뜨리며 이끌어온 우리 모두는 고개 숙여 지난 한해를 반성해야 하지 않겠나.
최근 과학자들은 지구에서 우주 탄생의 진원이라는 블랙홀까지 550억 광년이라고 밝혀냈다. 지구가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 이 공기돌 만큼 작은 공간에, 생로병사의 틀 안에서 잠깐 머물렀다 가면서 왜 이리 아우성들인가. 부질없는 집권욕심, 물질욕, 소유욕 때문에 뻥튀기 거짓말을 일삼고 중상모략, 배신 이런 것들이 얼마나 가련하고 허황된 것인가를 금세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1월, January의 어원은 희랍어의 야누스에서 온 말이다. 야누스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 두 개의 얼굴을 의미한다. 지난 한해 선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어도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어미 잃은 새끼 사슴의 산골 외로운 비명에 가슴 아파했고 교만, 탐욕, 교활, 증오의 저주들에 녹초가 되도록 시달려 왔다. 그러나 ‘고진감래’, 아프고 쓴 것이 지나가면 달콤한 행복이 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엔가 자리잡고 있는 사랑, 겸손, 정직, 용서, 화해의 미덕을 작동시켜야 한다.
새해에는 다 함께 심기일전 분발해 보자.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구상 최고의 ‘한글’을 사용하는 민족이다. 12척의 배로 일본 침략자 함선 1,300여척을 침몰시키고 세계 최고 전자산업을 리드하고 있는 민족이다. ‘방탄소년단’이 전 세계 음악 무대를 압도하고 있다.
사대 패배주의는 침 뱉고 밟아버려야 한다. 우리는 선으로 갈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571)326-6609
<
정기용 / 전 한민신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