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
2019-12-31 (화)
윤영순 / 우드스톡, MD
가을 학기가 끝나는 시니어 아카데미 종강시간에 모처럼 감명 깊은 최신 영화 ‘그린 북’을 감상했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기도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새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미국 역사상 백인과 흑인과의 색깔론은 지금까지도 유, 무식을 떠나 시, 공간을 초월해 미국이 떠안고 가야 할 숙명적인 사안이기도 하다.
확 트인 남부의 시원한 도로를 달리면서 성격도 취향도 인생관이 달라도 너무 다른 흑인과 백인 두 남성이 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예기치 않은 예민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룬 이야기이다.
영화제목 ‘그린 북’은 흑인들이 들어가서는 안 될 장소가 빼곡히 적힌 책자이다. 그 당시 정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장면 중에서 흑인에 의해 고용된 백인 택시 기사가 주인공 천재 흑인 피아니스트의 차를 운전하며 도로를 달리던 중 타이어에 펑크 난 것을 경찰이 발견하고 따라와 차를 정지시킨다.
남부 대평원에서 흑인 노동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하던 일을 멈추고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한결 같이 그들이 놀라 경이롭게 쳐다보는 표정은 차 안에 꼿꼿이 앉아있는 흑인과 펑크 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백인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천지가 개벽할 일을 눈앞에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흑백 남성 두 사람은 실존 인물들로 살아생전 우정을 함께 나누었다는 영화 끝의 자막이 더욱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언젠가 ‘자이안트’란 영화에서 본 장면도 전형적인 남부의 백인 부호가 집안에 어쩔 수 없이 흑인 며느리를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한 장면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절대로 흑인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구역에 흑인 며느리를 거부하는 식당 주인과 시아버지와의 격투 장면이다. 이 영화 ‘그린 북’에서도 특별한 재능으로 신분상승은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흑인의 자존감은 백인의 우월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는 비애를 실감 있게 그리고 있었다.
지금도 각양각색의 종족들이 어울려 묵묵히 미국을 살찌우며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샐러드 볼’이 아닌 큰 대접에 담긴 우리의 밥상 ‘비빔밥’을 연상하게 한다면 지나친 발상일까?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겨울 채비를 하는지 베란다 넘어 길가 인도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치우는 흑인과 라티노 젊은이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지나가고 있다.
<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