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돌아보며 돌보는 삶

2019-12-27 (금) 12:00:00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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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으로 투병 중인 친구가 텍사스, 휴스턴에 자주 간다. 그곳 암 전문병원에서 2주쯤, 길게는 한 달쯤 치료를 받고 돌아오곤 한다. 그렇게 단기간 묵으면 아파트 렌트를 할 수도 없으니 체류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친구는 숙식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휴스턴은 텍사스대학 MD 앤더슨 암센터를 비롯, 유명 암 전문병원들이 여럿 있어서 전국에서 그리고 외국에서도 환자들이 모여드는 도시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한 가닥 희망에 의지해 먼 길을 찾아오는 이들을 이 도시는 대단히 따뜻하게 맞아 준다고 친구는 전했다. 암 환자들의 숙식을 돕는 민간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있다고 한다.

타지에서 오는 환자들을 위한 아파트가 여러 곳에 마련되어 있어서 체류기간에 상관없이 저렴하게, 때로는 무료로 지낼 수 있으며, 이들 환자에게는 식사까지 무료로 배달이 된다는 것이다. 치료 받는 일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환자들이 삼시세끼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누군가가 기부한 아파트, 누군가가 기부한 돈, 누군가의 자원봉사로 이 모든 일은 가능할 것이다. 암 환자들의 캄캄한 고통과 절망감 옆에서 인류애는 꽃처럼 피어나고, 그 ‘꽃’을 통해 환자들은 살 용기를, 봉사자들은 삶의 보람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식사를 챙기기 어려운 환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단체들은 미 전국 곳곳에 꽤 있다. 샌디에고에서는 ‘특별 배달(Special Delivery) 샌디에고’라는 비영리단체가 근 30년 째 이 일을 하고 있다. CNN이 주변의 의로운 사람들을 발굴해서 보도하는 ‘CNN 영웅’ 중 하나로 소개된 이 단체는 1990년대 초반 루스 헨릭스라는 여성이 시작했다. 식당주인인 루스와 단골손님인 어느 AIDS 환자와의 인연이 발단이 되었다.

1989년 당시 미국에서는 AIDS가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연방질병통제센터에 의하면 환자가 10만명에 달하고 이들 중 근 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즈음 몹시도 여위고 병색 짙은 남성이 루스의 식당 단골이 되었다. AIDS를 앓고 있다고 밝힌 그는 매일 그 식당에 와서 그날의 유일한 식사를 하곤 했다. 그리고는 1년 반쯤 지난 어느 날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서 식당에 올 기력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었다.

몹시 상심한 루스는 “주소라도 알아둘 걸 …”하며 안타까워하다가 결심을 했다. 비슷한 처지의 다른 AIDS 환자들을 돕는 것이었다. 운신도 못하고 있을 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배달해주기로 했다. 그의 뜻에 식당 단골 다수가 적극 동조했다. 그렇게 자원봉사단을 꾸리고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어 매일 75명에게 점심과 저녁 식사를 배달했다.

이어 몇 년 후부터는 암이나 신장질환 등 다른 만성질환자들로까지 음식배달 서비스를 확대했다. 그렇게 오늘날까지 이들이 돌본 환자는 6,000명. 총 100만 개의 식사를 제공했다.

‘특별 배달’의 음식은 우리가 매일 습관처럼 먹고 마는 음식이 아니다. 2010년부터 식사를 제공받고 있는 한 AIDS 환자는 “특별배달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혼자 사는 그가 음식 만들 기력도 없으니 필시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특별 배달’로부터 받는 건 음식뿐이 아니다. 매일 ‘딩동’ 벨이 울릴 때마다 밀려드는 반가움, 5분 전만해도 아프던 몸이 한순간에 치유된 듯한 기쁨이 그에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고 한다. 사랑과 관심의 힘이다.

사람(人)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존재, 돕고 도움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도운 자가 언젠가는 도움을 받고, 도움 받은 자가 다른 누군가를 도우면서 세상은 이어져 왔다.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고 세상의 토대인데, 그 가치가 점점 잊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부모들은 고민에 빠진다. 장난감도 옷도 넘치게 많아서 새로 살 물건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새로 사들인 물건은 이전의 물건들을 밀어 넣으면서 집안은 거대한 물건의 더미가 되는 것이 소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렇게 풍요로우면 서로 이웃을 더 챙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하다.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망에 시선이 온통 성공과 풍요에만 꽂혀 있어서 옆을 돌아보지 못한다. 소유에 집중하느라 존재를 잃어버린 삶이다.

올 한해 쉴 틈 없이 일하며 산 결과는 무엇인가. 조금 더 늘어난 은행잔고, 더 많아진 물건뿐이라면 허망하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면, 한 사람의 삶에라도 도움을 주었다면 지난 한해는 가치 있는 한해였다.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면 이웃의 어려움이 보인다. 돌볼 대상이 보인다. 새해에는 더 돌아보고 더 많이 돌보며 살게 되기를 바란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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