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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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나는 길치다

2019-12-17 (화) 김희연 (SF공립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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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치’다. 자랑은 아니지만, 대학에 처음 와서 길마다 넘쳐나는 골목과 건물에 혼란스러워하며 일 년 동안 자주 다니는 건물들과 기숙사 건물이 그려진 자체 제작 지도를 들고 다녔다. 학기 초에 나눠 받은 종이 지도에는 쓸데없이 건물이 너무 많아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스트릿마다 이름이 어찌나 다양한지, 길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는 데만 평생이 걸린다. 가끔 가다간 항상 다니던 길도 이상해 보인다. 그럴 땐 스마트폰 지도를 켜서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맞게 가는지 확인하면서 가야 한다.

길을 잘 찾는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길을 잘 찾는 거지? 길눈이 밝은 사람들이 길치를 신기해하는 만큼 길치도 그들이 신기해 보인다. 내 주변엔 유독 길눈이 밝은 사람이 많은데, 그들을 보면 마치 머릿속에 완성된 지도가 존재하는 느낌이다. 길치로서 내 머릿속의 지도를 설명해보자면, 내가 자주 다니는 길만 이어져서 그려질 뿐, 평소에는 인터넷이 느릴 때 구글맵이 로딩되기 전의 화면처럼 회색빛의 이름 모르는 건물과 길 사이에 드문드문 아는 건물들이 뜬금없이 로딩되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길치로 살다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생기지만, 마음 아픈 나날도 있다. 길치를 처음 대했을 땐 신기해하던 사람들이 점점 지치거나 의심을 시작할 때가 바로 그런 때다. “넌 진짜 길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솔직히 아는 길을 모르는 척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길치도 남들은 쉽게 찾는 길을 헤매는 걸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록 남들보다 느리고 더딜지라도 언젠간 터득하기 마련이다. 3번 다닐 때도 헷갈리던 길이 4번째에 비로소 익숙해질 수도 있고, 혼자 다닐 땐 도무지 기억할 수 없던 길을 친절한 친구에 의해 세뇌당하며 걷고 난 후 터득하게 될 수도 있다. 이미 본인이 그 답답함을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곁에서 답답한 그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사랑으로 감싸주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익숙한 곳의 새로운 길도 두려운 마당에 새로운 곳의 새로운 길을 배운다는 건 길치에게 매우 큰 두려움과 걱정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길치인 덕분에 세상은 매일 엄청난 모험이다. 앞으로도 수없이 잃고 또 찾을 길을 생각하며, 오늘도 정신을 조금 더 또렷하게 차린 채 거리로 나서본다.

<김희연 (SF공립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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