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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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바다] 뭣이 중헌디?

2019-12-15 (일) 박주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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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학교교육 한번도 안 받은 사람, 계산기 최초로 만든 사람, 16세때 수학 논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 병으로 39세에 요절한 사람… 파스칼이다. 그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라 불리는 ‘팡세’. 그의 단편적 생각들을 모은 명상록이다. 청년의 사색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의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불멸의 고전이 되었고, 전쟁에 나가는 프랑스 군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다음은 팡세의 한대목이다. “인간에게 자신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없다. 그런데, 직장을 잃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시 당했다는 이유로 몇 날 며칠 분노와 절망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불안이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극도로 민감한데 가장 중대한 일에 무관심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파스칼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정작 죽음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끼게 되었고, 인생의 본질에 대한 탐구에 몰입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달라졌다.

내가 살던 우간다는 부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20여년을 살면서 수많은 사망 소식을 접했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죽음 하나가 있다. 그는 성실한 신학교 직원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기에 가족처럼 특별한 정을 주던 친구였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하루 일과를 점검했고, 더 할 얘기가 있어 보였지만 강의 시간이 임박한 나는 “수업 마친 후에 보자” 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1시간 반 후, 휴식 시간에 그가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후반부 강의를 마치고 왔을 때 사망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원인은 뇌졸증이었다. 불과 3시간 전, 마주앉아 웃고 대화하던 그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얘기할 고민이 있다더니 고민도 그와 함께 증발해 버렸다. 그 충격으로 난 며칠을 앓았다. 눈물로 퉁퉁 부은 눈, 덩달아 퉁퉁 부어 오른 입술... 도무지 추슬러지지 않는 몸을 침대에 걸쳐둔 채, 생각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3시간 만에 사라진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까? 천국과 지옥 어딘 가에 가 있을까? 아님 존재 자체가 훅~ 꺼진 촛불처럼 없어져 버렸을까? 나의 질문은 종교적, 형이상학적 사색이 아닌 지극히 실존적, 현실적인 것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은 더 이상 그가 아니니 그의 존재를 담은 영혼이 어딘가 있어야 말이 된다. 평생 그의 존재성을 규정하던 영혼이 한순간에 없어져 버린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3시간 전까지 그는 이 땅에 있었고, 땅의 것들로 삶이 꽉 차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몸에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꼈을 것이고, 삶과 죽음이 오버랩 되는 순간 혼란과 공포의 소용돌이를 경험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껏 살았던 세상을 떠나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름, 가치관, 성격 등 본인의 존재를 형성했던 그 모든 것들은 여전히 선명하다. 자기는 여전히 자기인 것이다.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한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아마도 급박한 상황 전개로 혼이 떨리고 정신이 없을 것같다. 몇 십년 살았던 지상의 삶을 결산해야 한다. 영혼 깊이 저장된 인생의 모든 행적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돌이킬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일이나 그들을 생각할 여유 따윈 없을 수도 있다.


며칠을 앓고 일어나보니, 장례 집행, 유족의 복지 및 처우, 후임 직원 물색 등, 후속조치로 모두들 꽤나 분주했다. 한가롭게 죽음에 대한 사색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인간은 그렇게 사소한 것들의 덜컹거림에 정신이 홀려서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 맞는 듯하다. 그러다가 죽음이 감지되는 공간 안에 들어설 때 비로소 그 빙산의 일각 앞에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파스칼은 세계를 놀라게 한 천재였지만 죽음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모든 거품을 벗고 진리 앞에 무릎 꿇었다.

한 해가 지나간다. 결산의 시기이다. 시끌벅적한 덜컹거림들로 인해 마음에 거품이 차오르고 생각의 눈이 흐려지지 않으면 좋겠다. 짧은 인생을 마감하며 남긴 파스칼의 간곡한 조언이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울림이 되기를… “진심으로 진리를 알고자 원한다면 그런 생각을 가진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더욱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단순한 철학의 문제라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전 존재가 걸린 문제가 아닌가?”

<박주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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