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탄핵, 그 소란스러움 앞에서

2019-10-04 (금) 12:00:00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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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지난 1일 95세가 되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중 ‘나이 95세’ 고지를 넘은 인사는 그가 유일하다. 2015년 암 진단을 받았지만 쾌유했고, 지난 5월 고관절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활동적이다. 카터 센터 프로그램들, 해비타트 집짓기 봉사, 고향 작은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직 등 그가 소명으로 여기는 일들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대통령 집권 4년(1977~1981)에 전직 대통령으로 활동한 지 근 40년. 그의 위상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별로 존재감 없던 대통령에서 가장 존재감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 바뀌었다. 실패한 대통령에서 이름만으로 신뢰가 따라붙는 성공한 글로벌 원로가 되었다.

인권과 평화를 위한 중재활동들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한 그는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다. 인권과 평화는 관심 사안의 맨 끄트머리쯤 차지할 트럼프는 실리를 위해 막말과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화끈한 대통령이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난민들 저지 방안으로 ‘다리에 총을 쏘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정도이다. ‘인권’ 같은 건 없다.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트럼프 시대가 탄핵 정국을 맞아 소란스러움이 가히 극에 달했다. 탄핵 조사를 하고 있는 연방하원 민주당을 향한 트럼프의 비난 트윗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트럼프에게 ‘탄핵’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취임 초반부터 ‘탄핵하라!’가 꼬리처럼 붙어 다녔다. 2016년 대선 당시 러시아를 종용해 상대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을 해킹하게 했다는 의혹부터 갖가지 불법 편법의 의혹들이 그를 ‘탄핵감’으로 도마 위에 올리곤 했다. 로버트 멀러 특검 수사로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러시아 스캔들’이라는 거대한 의혹의 산을 넘어선 트럼프가 어처구니없게도 작은 언덕 ‘우크라이나’에 걸리고 말았다. 평소의 언행으로 보면 그는 별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 중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부자에게 뭔가 있는 것 같으니 “조사 좀 해보라고 했을 뿐”이라고 그는 시인했다. 바이든이 부통령이던 때 아들 헌터 바이든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기업 이사로 재직했었다.

문제는 이와 관련 그가 대 우크라이나 군사원조를 지연시켰으니 ‘압박’이 될 수 있고, 바이든이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로 내년 선거에서 그와 맞붙을 적수 1호라는 사실이다. 선거에 이기려고 외국정부를 불법으로 개입시켰다는 의혹이다. 사실로 확인되면 탄핵감이다.

그런데 미국역사를 들여다보면 선거에 외국정부가 끼어들어 영향을 미친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카터 역시 그 희생자 중 한사람일 수 있다.

카터에게 백악관에서의 마지막 1년은 대단히 고통스런 기간이었다. 1979년 11월 4일 터진 이란 인질사건 때문이다. 그해 초 이란에서는 팔레비 독재왕정이 무너지고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부패한 팔레비 왕정을 수십년 지원한 것이 미국이기 때문에 이란 내 반미감정은 대단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팔레비 신병인도 요구에 미국이 불응하자 과격파 시위대는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외교관과 직원 63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1년여 그는 자국민들을 빼낼 방안을 강구하느라 노심초사했고, 빼내지 못해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 찍혔고, 경기침체까지 겹쳐 재선에 실패했다.


하지만 사실상 이란과의 협상은 대선 중이던 1980년 가을 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 동결된 자산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이란은 인질석방에 합의했다. 11월 선거 이전에 인질들이 풀려날 듯 보였고, 그랬다면 카터는 재선에 성공할 수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상대후보인 로널드 레이건 진영이 모를 리가 없었다. 레이건의 캠페인 매니저로 훗날 CIA 국장이 된 윌리엄 케이시가 인질석방을 늦추기 위해 호메이니 측근들과 접촉했다는 설이 워싱턴 정가에 오래도록 나돌았다. 그런 소문을 부추기는 것이 석방의 절묘한 타이밍이다.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 날. 선거참패 후 실의에 찼던 카터는 이날 아침 생기가 돌았다. 인질들이 곧 석방되리라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소원은 임기 중 인질석방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테헤란에서 인질들을 태우고 대기 중이던 비행기는 꼼짝하지 않았다. 비행기는 레이건이 취임선서를 하고 나서야 이륙하기 시작했다. 인질들은 레이건 대통령 하에서 석방되었다.

카터는 꼼수라고는 모르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기반한 원칙들, 사랑 선의 정직 도덕 평화 같은 가치들을 따르며 올곧게 걸어왔다. 조지아의 고향마을 플레인스에서 결혼생활 73년의 부인 로잘린(92) 여사와 매일 저녁 손잡고 산보하듯이 그렇게 평생을 조용하게 걸어왔다. 그것이 그가 받고 있는 존경의 토대일 것이다.

탄핵으로 소란스러운 정국을 보자니, 그로부터 수십 광년 떨어진 듯 고요한 그의 삶이 새삼 빛나 보인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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