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떡밥 던지기’에만 열심인 언론들

2019-09-25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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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매체인 뉴욕타임스가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의 과거 성추문 의혹과 관련한 기사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 15일자 선데이 리뷰 판에 자사 기자 2명이 발간할 예정인 책의 내용을 인용, 캐버노 대법관이 예일대 재학 당시 파티에서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한 여학생에게 들이밀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하지만 초판 기사에서 피해자로 지목된 여성이 인터뷰를 거절했다는 사실과 “이 여성이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친구들의 증언을 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빙성 논란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를 향한 비판의 요지는 ‘균형의 상실’이다. 논쟁적 사안을 다룰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해 균형을 잡는 것이 기사의 ABC임에도 피해자 진술을 일부러 누락시킨 것은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썼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특히 워싱턴포스트가 이미 오래 전 캐버노 성추문 관련 의혹을 인지했음에도 피해자가 인터뷰에 응하지 않자 기사화를 접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뉴욕타임스는 한층 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기사 내용에 언급되는 당사자들의 입장을 들어보고 이를 담는 것은 보도의 기본자세다. 뉴스가 지향하는 진실과 사실의 보도는 이런 자세를 저버리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아무런 검증 없이 일방의 내용만 전하는 뉴스는 공정보도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이런 보도행태는 자칫 뉴스 당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뉴욕타임스 논란을 보며 그래도 미국은 아직 최소한의 양식은 살아 숨 쉬는 사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가 일상화된 한국에서는 이런 논쟁조차 실종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생겼을 때 온갖 형태의 미디어들이 댐의 물을 방류하듯 쏟아내는 기사들은 보기만 해도 질릴 정도다.

‘단독’ ‘속보’ 등의 꺾쇠를 달고 나오는 보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사 작성의 기본조차 결여된 함량미달 불량품들이 수두룩하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의혹이랍시고 보도하거나 이미 나온 다른 매체 기사들을 살짝 가공해 뉴스소비자들 앞에 내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니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클릭수를 유도하고 화제가 되면 이미 목적달성이다. 언론 윤리는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식의 배짱이 놀랍다.

난립하는 매체들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동시에 이를 통해 수익을 만들어내야 하는 미디어 환경이 초래한 어지러운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유럽의 대표적 지식경영인으로 주목받는 작가 겸 기업가 롤프 도벨리가 뉴스 무용론을 펼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식으로 생산 유통되는 정보들은 너무 단편적이고 피상적이어서 사실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혹은 축소해 우리의 인식을 오히려 호도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정치와 사회를 깊이 있게 다루는 안목 있는 ‘탐사 저널리즘’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형편이니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세계주요 38개국 조사에서 4년 연속 부동의 꼴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옥스퍼드대 부설연구소가 발표한 ‘디지털뉴스 리포트 2019’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뉴스신뢰도는 22%로 38개국 가운데 맨 뒷자리였다. 38개국 가운데 1위는 핀란드로 59%의 신뢰도를 나타냈다.

더 서글픈 것은 한국인들이 이처럼 언론을 불신하면서도, 대부분 자신들이 선호하는(믿을 수 있는 매체로 분류한) 몇 개 언론에는 파이프를 연결한 채 끊임없이 불량뉴스들을 제공받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언론은 더욱 불량해지고 구성원들 간의 불신은 커져만 간다.

의혹을 제기했으면 사실관계를 끝까지 추적해 명백한 진상을 밝혀내야하는 게 언론의 의무다. 하지만 조국 일가와 관련해 봇물처럼 터져 나온 의혹들 가운데 이 과정을 거친 보도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던져 놓고는 그만인 의혹들이 대부분이었다.

뉴욕타임스 보도 논란에 대해 CNN은 “망가진(botched) 캐버노 스토리 때문에 뉴욕타임스 기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떡밥을 던져 놓았으면 회수할 줄도 알아야 낚시터가 깨끗해진다”는 한 언론학자의 따가운 일침을 ‘망가진’ 모든 언론은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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