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주주의 위협하는 ‘편집증의 정치’

2024-03-05 (화)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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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지난 1964년 고전적 정치 에세이 ‘미국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호프스태터는 “미국이 온통 좌파의 음모로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극우세력의 지지를 얻어 그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배리 골드워터의 사례를 들며 “미국정치가 점차 편집증에 사로잡혀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경고했다.

그는 “거대한 음모가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식의 담론을 계속 만들어내면서 이를 막아낼 수 있는 길은 끝없는 ‘십자군 전쟁’뿐이라고 주장하는 정치를 ‘편집증적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당시 “애국자가 아니면 모두가 간첩”이라는 식의 이분법에 깊이 빠져있던 세력이 경도됐던 대표적 음모론 가운데 하나가 ‘매카시즘’이다.

편집증에 사로잡힐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은 망상장애이다.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이 함께 나타난다. 그러면서 합리적인 판단과 사고가 힘들어진다. 흑백논리에 쉽게 빠지며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믿음을 꺾지 않는다.


이 같은 증상이 수반되는 편집증이 정치적으로 심화될 경우 미국사회는 치유가 힘든 깊은 병증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했던 호프스태터의 우려는 안타깝게도 현실이 돼 버렸다. 현재 무수한 미국인들이 정치적으로 잘못된 믿음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공당을 표방하는 세력조차 심각한 편집증을 나타내고 있다.

2017년 극우 온라인 게시판에서 태동한 ‘큐어넌’(QAnon)은 온갖 편집증적인 음모론을 퍼뜨려온 대표적인 극우 단체다. 이 단체는 민주당과 연결된 악마숭배자와 소아성애자들의 비밀 집단인 ‘딥스테이트’가 정부를 통제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신봉한다. 이들에게 트럼프는 이 같은 악에 맞서 십자군을 이끌고 있는 인물로 여겨진다.

이런 허황된 주장을 확고히 믿고 있거나 어쩌면 사실일 수 있다고 여기는 미국인이 31%에 달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공화당원 사이에서는 그 비율이 무려 53%나 된다. 어쩌다 미국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

미국정치의 편집증 심화는 소셜미디어의 확산이 초래한 어두운 단면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중심에는 트럼프와 일부 극우언론이 존재한다. 트럼프가 정치판에 뛰어든 이후 수많은 정신과 전문의들은 그에 대해 “편집증적이고 망상적”이라는 진단을 내려왔다. 대통령 당선 이전에도 그랬고,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 후 그가 보이고 있는 행태에 대해서도 같은 진단이 나왔다.

트럼프는 “대선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해왔다. 그가 편집증적으로 무분별하게, 그리고 무책임하게 뿌려댄 망상의 씨앗들은 2021년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연방의회 폭동을 촉발했다. 트럼프와 함께 이런 반민주적 폭거에 기름을 부은 것은 폭스뉴스였다.

폭스뉴스도 ‘대선사기’ 주장을 퍼뜨리며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집중 보도했다. 결국 거짓보도의 대가로 폭스뉴스는 투·개표기 업체에 무려 7억8,75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어주게 됐다. 트럼프는 폭스뉴스가 쌓아 올려온 이런 편집증적인 세계관을 가장 잘 구현해내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거짓 주장과 보도에 대한 비판과 법률적인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미 편집증적 주장에 물들어버린 다수 미국인들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는 것 같다. 지난 1월 실시된 공화당 아이오와 코커스에 나온 유권자 대상 설문에서 50% 이상은 여전히 바이든이 선거를 훔쳐갔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워싱턴 포스트와 메릴랜드 대학 공동조사에서 연방의회 폭동을 연방수사국(FBI)이 기획하고 선동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여기는 미국인들이 무려 25%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런 미국을 상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12월 콜로라도 주 대법원은 트럼프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자 퇴행을 보여준 연방의회 의사당 폭동사태를 부추겼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피선거권을 박탈했다.(메인 주와 일리노이 주 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근거법률은 ‘공직자가 내란·반란에 가담한 경우 다시는 공직을 맡지 못 한다’는 수정헌법 제14조 3항이었다.

하지만 지난 2월8일부터 이 결정의 적절성을 따지는 심리에 들어간 연방대법원은 4일 “수정헌법 제14조 3항을 집행할 책임은 주 정부가 아닌 의회에 있다”는 이유를 들어 트럼프의 출마 자격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케이스에는 미국의 국기(國基)보존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판단이 걸려 있었지만 연방대법원은 법리를 근거로 주 법원들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연방대법원의 심리는 정치적 편집증 환자들이 초래하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에 경종을 울릴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연방대법원의 판단이 나옴으로써 이제 그 역할은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 할 깨어있는 시민들의 몫으로 남게 됐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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