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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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삼대가 함께한 고스톱 한판

2019-09-05 (목) 채영은(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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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북가주 산불로 산호세 지역까지 창문조차 열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심각하게 안 좋았던 때에, 서울에 계신 시부모님께서 아들이 새로 이사한 집과 북가주 지역에 꼭 와보고 싶다고 하셨다. “지금 공기도 안 좋고 날도 추우니 내년에 날씨 풀리고 따뜻할 때 오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씀드렸다. 솔직히 10시간 이상 장거리 비행기를 왕복으로 타실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각 진료과마다 처방된 병원 약들만 해도 매끼니 한 움큼인지라 “차라리 저희가 서울로 찾아뵐게요” 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내년이면 늦으리, 바로 지금, 연말이면 좋겠구나”라고 하셨다.

남편은 묵묵히 일정과 항공권을 차근차근 준비했고, 어른들은 담당의사들의 확인과 비상약, 주의사항 등을 꼼꼼히 챙기시고 장도에 오르셨다. 손자의 겨울방학과 날짜가 맞아서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즐거운 연말을 보낼 수 있단 사실에 너무도 기뻐하셨고 기대하셨건만, 태평양을 건너는 피곤한 긴 비행을 거친 후 시차로 인한 피로 누적과 여러 증상으로 내내 힘들어하셨다.

그 와중에 노인성 치매증상 예방을 위해 손자가 준비한 시간이 있었으니. 어른들께서 자주 못만나는 하나뿐인 친손자를 데리고 몇 년 전부터 시간날 때마다 함께한 고스톱의 세계였다. 나로선 아무리 설명해줘도 못알아듣는 고스톱의 용어와 룰, 점수 계산 등을 손자는 찰떡같이 이해하고 재미있어 했다. 일찍이 본인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능숙한 아빠와, 거동조차 힘드시지만 왕년 감각만큼은 여전하신 할아버지와, 재야의 숨은 고수신 할머니께, 대학생 손자는 저녁식사 후 거실 탁자에 담요를 깔고 “도전!!”을 외쳤다.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자의 제안에 응하셨고, 몇 판 져주시는가 싶더니 이내 오랫만에 실력 발휘를 하셔서 판을 연거푸 싹쓸이하셨다. 초보시절 같았으면 가진 동전 다 털렸다고 눈물바람이었을 손자는 이제 좀 컸다고 와하하 함박웃음으로 마무리했다.

미국에 머무신 3주간 많이 힘드셨고 귀국 비행기 안에서도 비상약을 다 소진하실 정도로 힘든 상황이셨던 할아버지. 이후 손자는 여름에 한국서 재도전을 희망했지만 하루하루 약해져 가는 할아버지 컨디션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불현듯 삼대의 끈끈한 고스톱 전통은 다음 대에도 여전히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건 왜 일까. 아마 삼대가 한자리에 모여 함께했던 훈훈한 ‘시간’과 ‘추억’으로 남기 때문일 것이리라.

<채영은(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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