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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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불완전함의 미학

2019-09-03 (화) 유명현(동시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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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기술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인문학도가 어느 날부터 실리콘밸리 지역의 기술, 투자 관련 통역사가 되었다. 기업이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피칭까지 맡게 되었다. 정치인을 한번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던 평범한 사람이 강연이나 국제 행사에 참석하는 유명 정치인들을 수행하며 통역했다. 천문학적 액수의 투자에 대한 면담을 초근접거리에서 듣고 옮겼다. 사람들이 한번씩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나고 통역하게 됐어요?” 그럴 때마다 있는 척 허세를 부리며 스펙 관리의 노하우를 줄줄이 나열하고픈데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두툼한 밑천없이 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최선인지 차선인지도 모르고 당장 손에 돈을 쥐여주는 일을 해야 했기에, 애초에 원하는 바를 바라보며 필요한 것 위주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는 스펙 관리 자체가 내게는 사치였다. 솔직히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친 생존 투쟁의 기억밖엔 없다. 누가 물어보면 그 순간 만큼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남의 집 귀한 딸 행사를 하고싶었나 보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척 얼버무리려 해도 거짓말을 하면 심장박동이 솟구쳐 얼굴이 달아올라 말을 더듬게 되는 성향이 있어 오히려 상대를 높이는 겸손을 방패삼아 대화의 주제를 바꾼다. 뭘 해먹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다 가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언어 구사력을 요하는 직업 위주로 연이 닿았던 것뿐이다. 그렇게 상황에 등떠밀려 여러가지의 일을 감당해야 했던 나는 늘 새로운 도전과 과제 앞에 몇일을 주눅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일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은 돈을 주고 실습까지 시켜주는 무료 직업학교라고 여긴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를 좌절시키고 나면 두려움이 동기가 되어 겁에 질려 행동하던 사람에서 과정 속의 고유한 암묵적 요소를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된다. 그후 더 많은 기회들이 문을 두드렸다. 예기치 못한 일들을 감당해야 했던 시간들 덕분에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여러가지 일을 했기에 매일 꿈꾸던 일도 업이 되면 결국 환상이 깨진다는 것을 미리 체험했고. 오늘의 이 평범함을 온전히 품고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왔다.

<유명현(동시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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