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임자들의 운명

2019-08-27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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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1등 공신을 들라면 청계천 복원이 꼽힐 것이다. 60~70년대 경제 개발의 상징이던 청계 고가도로와 복개도로가 흉물로 변해버리자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이를 헐고 청계천을 개울로 복원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친환경 시대정신에는 맞는 생각이었지만 현실성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이명박은 인근 주민들과 4,000회에 달하는 모임을 가지며 집요하게 설득한 결과 20만 상인들의 동의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지금 청계천은 한해 1,800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명소고 가장 성공적인 도시환경 개선사업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국민들은 2007년 선거에서 사상 최대 표차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


그러나 청계천으로 재미를 본 이명박은 물과 토목공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취임하자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밀어붙였다. 대운하는 원래 수에즈나 파나마에서 보듯 두 바다가 좁은 육교로 막혀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반도처럼 3면이 바다고 육상교통이 발달돼 있는 상황에서 소백산맥을 뚫어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시키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반발로 접기는 했으나 그 뒤를 이어 추진된 4대강 사업도 ‘사실상의 대운하 사업’이란 비판에 휘말려 온갖 억측만 낳으며 국정추진 동력을 잃었다. ‘물로 흥한 자 물로 망한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박근혜가 정계에 투신한 것은 1997년이지만 진가를 발휘한 것은 2004년 총선 때다. 그해 당시 한나라당은 의석수만 믿고 국회에서 노무현 탄핵을 강행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데다 ‘차떼기 사건’까지 겹치면서 당의 존립 자체가 흔들렸다. 이때 당대표가 된 박근혜는 소위 ‘천막 당사’를 차려놓고 국민들의 용서를 빌어 당을 살렸다. 이때부터 박근혜에게는 ‘선거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란 말도 이때 생겼다.

이에 힘입어 2012년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는 국민들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던 모습을 버리고 점차 보수우파의 가치를 담은 정치가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추종자를 규합하는 정치를 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15년 한때 자신의 비서실장이었지만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며 유승민을 내친 일이다. 이때부터 이 사람이 진짜 친박인지 가짜 친박인지 감별하는 ‘진박 감별사’라는 말이 생겼다.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는 이 사람이 친박이냐 아니냐가 공천을 받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다. 그리고는 국민에게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 달라”고 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와 친박의 오만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조국이 쓴 책은 여러 권이지만 그 중에서 그의 일생을 바꿔놓은 책이 있다면 그것은 ‘진보 집권 플랜’일 것이다. 2010년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쓴 이 책은 어떻게 해야 진보가 집권할 수 있으며 집권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를 적은 책이다. 조국은 이 책을 당시 정계투신을 고민하고 있던 문재인에게 보냈고 문재인은 열독 후 독후감을 써 조국에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평등, 공정, 정의는 이 책의 핵심가치다.


특권과 불공정 없는 사회를 누구보다 큰 소리로 주창해온 조국이 실제로 산 모습은 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서울대 동문 사이트인 스누프 라이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동문들의 97%가 조국이 법무장관으로 부적격이라고 답했다. 일반 여론조사도 60%가 부적합으로 기울었고 그 여파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도 처음으로 50%가 넘어섰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조국을 ‘후안무치’한 인물이라며 법무장관 후보직을 즉각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서울대와 고대생들이 촛불로 일어난 문재인 정부를 향해 촛불을 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은 조국을 버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실현할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다 문재인 정부 탄생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운명공동체라 여기기 때문이다. 온갖 악재에도 40%가 넘는 지지율도 그쪽으로 가라고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 사람은 자기를 일으킨 것에 의해 망하고, 바위 같던 지지율이 바람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임자들의 운명을 숙고하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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