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간신학’을 통해본 정치기상도

2019-08-26 (월) 12:00:00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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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다스림이란 군자가 여럿 모여도 이루기에는 부족하나, 한 사람의 소인일지라도 망 치 기에는 족하다.” 송사(宋史) 유일지전에 나오는 말이다.

숱한 왕조가 명멸한 중국역사는 소인배, 다시 말해 간신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명한 군주가 양신(良臣)과 함께 치세를 구가한 시기는 극히 짧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기는 어리석은 군주와 간신들이 어우러진 혼세(昏世), 아니면 난세였다.

그 5천년 중국역사에서 최악의 간신은 누구일까. ‘간신학’에 밝은 한 전문가는 다소 의
외의 인물을 지목한다. 중국의 ‘3대 간상(奸相)’ 당 현종 때 이임보, 남송 흠종 때 진회, 명 세종 때 엄숭을 그 후보로 올려놓고 결국은 엄숭을 점지했다.


왜 엄숭인가. 그는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말하자면 조야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런데 온갖 술수를 부리며 국정을 어지럽혔다. 그 죄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충신을 모해한 매국노 진회보다 더 악랄하다는 것이다.

당쟁과 사화로 얼룩진 조선조도 간신 스토리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 조선조에서 ‘역대급’ 간신들을 어느 때보다 많이 배출시킨 때는 연산군에서 중종, 명종에 이르는 시기다.

임사홍, 유자광, 남곤, 심정, 이기, 윤임, 윤원형 등이 그 시대를 풍미한 면면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끼친 인물로 ‘정유삼흉’의 1인으로 불린 김안로가 지목된다.

왜 김안로인가. 대유(大儒)라고 불릴 정도는 못된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장원급제한 엘리트다. 좋은 가문출신에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가 쓴 글은 이치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한 마디로 군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이 당대의 평이었을 정도다.

게다가 외모가 단아했다. 종일토록 꼼짝 않고 앉아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관옥과도 같았다.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면 하나도 구겨진 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남인데다가 고고한 선비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다.

“썩은 선비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겠다.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를 복원시키겠다.” 왕(중종)의 사돈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을 때 김안로가 내뱉은 일성이다. 적폐척결을 부르짖고 나선 행동하는 양심이랄까. 선비들의 가슴은 뭉클했다.

그는 명분과 공론을 내세우는데 탁월했다. 삼사의 대간도 쉽사리 장악, 그의 수족기관으로 전락했다. 이후는 제멋대로였다. 낙하산 인사는 예사이고 보복인사도 서슴지 않았다. 공론을 핑계대면서 조정을 ‘내 사람’, 아부꾼들로만 가득 채웠다.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한 것.


“그가 평소 행한 일과 글을 대비해보면 물과 불처럼 상반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사요(蛇妖)나 귀얼(龜孼) 보듯 한다.”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김안로에 대한 당시의 세평이다.

최악의 간신은 왜 엄숭이고, 김안로인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본다.

‘간신학’의 태두격인 ‘후흑학(厚黑學)’ 창시자인 청나라 말의 이종오는 이렇게 설파했다.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뱃속이 시커먼 정도는 후흑학 수업의 1단계에 불과하다. 2단계에서는 낯가죽이 두텁되 단단하고, 뱃속이 꺼멓되 밝게 비쳐야한다.”

희대의 간신으로 불린다. 그런 인물들도 거의 다가 후흑학 1단계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김안로와 엄숭은 뱃속이 컴컴한데도 밝은 것으로 비쳐졌다. 공론을 내세워 조정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었다. 후흑학 2단계 입문수준이랄까. 확실히 차원이 달랐던 거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특권은 부정되고 인간은 존중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가 아니던가.”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총신 조국이 한 말이다. 가슴을 뛰게 하는 명언의 병행구라고 할까.

조국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 “진보는 약자나 빈자의 편입니다. 계층상승의 통로가 막힌 사회는 신분사회입니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는가가 삶을 결정해버리는 사회,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 조국이 어느 날 돌연히 막장부조리극의 주인공이 됐다. 사실 ‘죽창가’를 선창하면서 애국이니, 이적이니 자극적 언어로 편을 가르며 반일을 선동할 때 뭔가 이상 징후는 느껴졌다.

그러다가 터진 게 수십억 원대의 사모펀드와 부의 대물림, 수상한 부동산거래에서, 딸의 입시특혜 등 각종 스캔들이다.

하나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서 조국과 관련된 모든 것은 거짓이고 착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어쩌다 이런 지경을 맞게 됐나. 차라리 후흑학 2단계 수련을 마치고 3단계에 진입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2단계만 마스터했어도 부동산투기든, 부정입학이든 그가 하는 일은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로 사람들은 믿는다. 3단계 수련을 마치면 세인은 물론 하늘마저 아무리 두꺼워도 두껍지 않게, 아무리 시커매도 시커멓지 않게 여긴다고 하던가. 그러니 애석해서 하는 말이다.

조국 주연의 막장부조리극에는 눈물겨운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안보를 내팽겨 쳤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를 통한 문재인 대통령의 국면전환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으면….

그 문 대통령은 그러면 훗날 어떻게 평가될까. ‘사림’ 콤플렉스에 걸려 사화만 일으킨 중종, 측근과 지지세력만 쳐다보다가 임진왜란이란 참화를 자초한 선조. 용렬하기만 한 그 둘의 모습이 자꾸 겹쳐지는 느낌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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