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점차 ‘통계’가 되는 총기참사

2019-08-14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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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첫째 주말 미국을 피로 물들인 잇단 총기난사 사건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강력한 처벌과 부적격자 총기박탈 등 몇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트럼프의 대책에 대해 정치권과 언론은 원인진단부터 잘못됐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특히 비판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정신질환이지 총기가 아니다”라는 그의 발언에 집중됐다.

트럼프의 이 같은 발언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대단히 부적절하고 위험한 주장이다. 그는 마치 정신질환이 현 사태의 근본원인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낮다. 그리고 미국의 정신질환자 비율은 다른 나라와 비슷하다. 그러니 정신질환을 참극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는 건 억지다.

정신질환이 아니라 트럼프가 궤변으로 두둔하려 했던 총기가 바로 진짜 주범이다. 물론 대량살상이 발생하려면 이런 행위를 결심하게 만드는 환경적 심리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범인의 마음속에 증오가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총기가 없다면 그런 참사는 일어날 수 없다. 대량살상의 충분조건은 오로지 총기뿐이다.


범죄심리학자 잭 레빈은 “사회적 증오가 참사로 발전하는 것은 범죄자의 중무장이 가능한 미국적 조건 때문”이라 진단한다.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에서 지구촌 집단총격사건의 31%가 발생한다는 사실은 진단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준다. 이러고도 과연 ‘문명국가’라 할 수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사건들이 일어나다보니 이런 현실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의식도 점차 무뎌지고 있다. 총기사건을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지점을 넘어 이제는 대량살상을 그렇게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미디어도 소소한 총기사건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언론인 케이트 모건은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참사가 발생했을 때 형언키 힘들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던 자신이 지난해 초 플로리다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격사건을 알리는 뉴스얼럿이 아이폰에 떴을 때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냥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고 개인적 경험을 토로한다. 샌디훅 참사 후 무수한 교내 총격사건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런 뉴스로부터 자신을 심리적으로 차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모건의 이런 고백은 심리학자들 분석에 따르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툴레인 대학 트라우마 연구소의 찰스 피글리 박사는 “우리는 행복과 안전함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며 “총기참사 같은 비극이 일어나면 우선 ‘지금 나와 아이들은 안전한가’ 자문해 본 다음 그 대답이 ‘예스’면 그런 사건을 애써 무시하거나 차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대량살육 같은 사건이 안겨주는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지속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둔감화를 통해 이를 완화하거나 해소하려 든다는 얘기다.

이처럼 둔감화가 각 개인들의 생존을 위한 반응기제이긴 하지만 이것이 집단적 현상이 될 때 근본적 문제의 해결은 한층 더 멀어지고 어렵게 된다. 미국인들 사이에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는 총기사건에 대한 둔감화는 그래서 걱정스럽다.

텍사스와 오하이오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의 규모와 성격이 충격적이었던 탓인지 “이제는 정말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9%가 총기를 ‘강력히’ 혹은 ‘적절히’ 규제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내년 선거를 의식한 듯 트럼프와 공화당도 무언가 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대량살육 사건이 터지면 분노와 총기규제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목소리가 잦아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는 패턴이 반복돼 왔다. 이런 패턴이 반복될수록 둔감화와 무력감은 더 심해진다. 그러면서 점차 미국인들 뇌리에 총기참사는 무미건조한 수치와 통계로 각인된다. 어쩌면 이번이 총기규제와 관련해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몸이 보내는 신호인 통증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무시하면 심각한 결과로 이어진다. 미국사회가 둔감화를 넘어 무감각의 단계로 나가지 않을까 두렵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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