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혼자서도 잘해요

2019-08-12 (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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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잘해요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현재 2030세대라면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을 보자마자 매일 아침 학교 갈 준비를 하며 시청하던 TV 프로그램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꺼야 꺼야 할거야 혼자서도 잘할거야” 라는 주제가도 함께.

어린 시절 그 프로그램을 보며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하나하나 배워갔다. TV에서 젓가락 쓰는 방법을 보여주면, 그걸 보고 나 혼자 젓가락을 잡아봤다가 수없이 떨어뜨리고, 부모님이 플라스틱으로 된 가볍고 작은 젓가락을 사주시면 그걸 갖고 연습했다가, 손 힘이 더 자라면 어른용 쇠 젓가락으로 연습해보는 식으로.

그렇게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나기 위한 기술을 차근차근 배울 수 있었다. 깨끗이 양치하기, 정리정돈하기, 책가방 싸기, 부모님 심부름하기, 신발 끈 묶기 등등. TV에서 보여준 것들을 어설프게 따라 해보려고 하면, 주변의 어른들이 끝없는 인내심을 갖고 도와주었다. 주변의 수많은 도움 덕에 ‘혼자서도 잘 하는’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는 미국 땅에 홀로 나오게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이, 부모님도 친척도 친구도 없이 그저 혼자. 아무도 의지할 수 없이 생존을 위해 ‘혼자서도 잘해요’를 외쳐야 했다.

미국에서 홀로 ‘혼자서도 잘해요’를 해나가는 건 어릴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도와줄 수 있는 성인이 없었으니까. 운전면허를 따야하는데 차를 가지고 오라니, 차를 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면허를 따란 말인가. 차를 빌려줄 사람이 없으니 차를 사야겠는데, 지금까지 승용차와 버스, 트럭 정도를 간신히 구분하던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차를 사란 말인가.

어느 날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천장에서 물세례가 쏟아졌다. 놀라서 올려다보니 천장에 있는 틈으로 물이 콸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급한 대로 양동이를 받쳐놓고 위층에 가서 확인해보니 윗집이 수도를 잠그지 않고 외출하는 바람에 아래층 우리 집으로 물이 쏟아지고 있는 거였다. 아파트 오피스도 문 닫은 야심한 시각. 도대체 이럴 때는 어떻게 혼자서 잘해야 하지.

반지하 방에서 기어 나오는 지네를 잡는 것도, 풀 사이즈 매트리스를 혼자서 들고 오는 것도, 무거운 가구를 옮겨야 하는데 혼자서는 가구를 해체할 수도 들 수도 없어서 드라이버를 붙잡고 멍하니 좌절하는 것도, 아파트 오피스에서 돈을 잘못 청구하는 바람에 긴장되는 심장을 안고 오피스에 가서 직원에게 하나하나 따져 환불을 받는 것도, 전부 혼자서 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혼자 성인이 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유년시절의 ‘혼자서도 잘해요’는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자립심을 키워줬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미국에서 하고 있는 ‘혼자서도 잘해요’는 자립심보다는 고립감을 더 키워줬다. 혼자만 뚝 떨어져 살고 있는 듯한 느낌. 다들 연결되어 있는데 나만 연결을 잃어버린 느낌.

혼자서 스타벅스에 앉아 일하고 있는데 가족이 다 함께 와서 음료를 주문하고 웃고 있는 걸 보면, 내 테이블과 저들의 테이블은 다섯 걸음밖에 떨어져있지 않은데도 다섯 행성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나 가까운데도 그렇게나 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낯선 땅에서 ‘혼자서도 잘해요’를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너무 힘들지 않게, 너무 외롭지 않게, 마음을 돌보며 차근차근 해 나갔으면.

<김미소 펜실베니아 주립대 응용언어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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