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베트남계 친구들을 보며

2019-08-10 (토) 12:00:00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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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거의 익사 직전이네요…. 자, 이렇게 한번 해 봐요.”

가지런히 모은 발로 돌핀 킥을 두 번하면서 양팔로 물을 세게 밀어주면 얼굴이 자연스럽게 수면 밖으로 나오는데 그때 얼른 숨을 들이 마시고, 뒤로 뻗은 양팔을 수면 위로 빼서 힘차게 앞으로 뿌리면서 고개를 얼른 물속으로 재빨리 밀어 넣으면 한결 역동적인 버터플라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게 원 포인트 수영레슨을 해주는 작은 체구의 베트남계 여성은 몇 달 만에 수영장에서 마주친 스탠포드 교육대학원 출신의 이 지역 고교 수학교사이다. 자유형과 평영은 어느 정도 할 만한데 접영과 배영이 제일 힘들다고 했더니, 수영을 마치고 나가려던 그녀가 나의 수영을 관찰하고는 친절하게 접영 코치를 해준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램’으로 ‘양’처럼 들린다. 가끔 마주칠 때 마다 FBI 요원 스탈링 역의 조디 포스터의 명연기와, 괴기한 정신과 박사 ‘한니발 렉터’ 역을 한 앤소니 홉킨스의 소름 끼치는 악마적 연기가 압권이었던 ‘양들의 침묵’이 떠오른다. 마주칠 때마다 그 영화제목으로 익살스럽게 불러도 항상 재미있게 받아주는 그녀의 이름은 실은 양(lamb)에서 제일 뒤의 묵음인 b가 없다.

1975년 4월말 월남 패망 이후 보트에 몸을 의지해 무작정 모국을 탈출해 동지나의 망망대해를 떠돌다 구조돼 홍콩 등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던 수십만명의 베트남 난민들은 미국의 인도적 배려로 고국인 월남과 따뜻한 기후가 비슷한 LA, 휴스턴, 뉴올리언스 그리고 이곳 산호세 등 4개 지역으로 분산 수용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상권으로는 오렌지카운티의 ‘리틀 사이공’이 제일 알려져 있지만, 인구 면에서는 산호세가 으뜸이다.

이들의 정착시점인 80년대 실리콘 밸리는 대호황으로 일자리가 넘쳐났다. 그 결과 지금 약 18만명이나 거주하고 있어서 샌호세는 베트남 본토 밖에서 베트남인 최다 거주지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제는 시의원을 배출할 정도로 탄탄히 다져진 입지를 타 이민사회에 과시하면서, 이민 역사가 긴 중국계, 일본계, 남 인도계 이민사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수영장에서 만나는 또 다른 베트남 출신 친구로는 이름도 나하고 비슷한 ‘둑’이 있다. 품격 있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50대 중반인 그는 감출 수 없는 슬픔 한 자락을 담고 산다. 20대 중반인 외아들이 가벼운 정신박약을 앓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아들 곁에 머물며 수영은 제대로 하는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지 등 늘 조바심 내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살피는 것을 나는 10여년을 친구로 지내면서 절로 알게 되었다.

그는 75년 4월 월남 패망 직전 온가족이 탈출한 케이스라고 한다.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친척으로부터 전황이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차에, 패망 20여일 전에 월남공군 조종사가 F-5기를 몰고 구엔 반 티우 당시 대통령을 폭사시킬 의도로 대통령 궁에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탈출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부모를 따라 12살 나이에 친척과 함께 온 가족이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이 주선한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왔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한반도 사태를 바라보며 한국에도 이와 비슷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해 나라가 어이없게 무너지며 수백 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지나 않을까 정말 조마조마하다.
현 정권은 대일 외교를 파탄지경으로 몰고 가면서 감정적인 반일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고, 일각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12척의 배와 동학의 죽창부대를 언급하면서 국민들을 대결 모드로 선동하고 있다. 그도 부족해 일본열도가 화산폭발로 가라앉을 거라는 어이없는 저주마저 한편에서는 나오고 있다.

일본의 공언대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삭제 여파로 주식폭락, 환율 폭등 사태가 벌어지고, 재앙과도 같은 제2의 IMF 사태가 다시 임박했다는 불길한 경종을 듣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부디 모국의 대통령은 국가를 안전하게 통치해 국민 모두가 편안한 가운데 번영하는 경제의 과실을 향유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책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자각해 이 사태를 슬기롭게 수습해 주길 바랄 뿐이다. 지난 50여년 피땀 흘려 이룩한 자랑스런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

<김덕환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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