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만남, 한 사람을 만난다. 눈을 감고도 그 길을 그릴 수 있다. 약속 시간을 정하면 장소는 늘 만나는 익숙한 그곳으로. 서로가 알고 있는 그 자리 언저리에 앉아 있을 때면, 6피트에 달하는 훤칠하고도 마른 그녀의 주름진 긴 팔이 가지를 뻗 듯 내려오며 반갑게 허그한다. 초성이 조금은 길게 한국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푸른 눈이 아이처럼 맑다. 세월이 부여했음직한 권위 의식이나 나이차로 인한 생각의 불편함 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도서관의 1:1 영어 발론티어 매치 프로그램으로 인연을 맺은 그녀는 세월이 지나며 서로의 관심사와 근황을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이 지구상 서로 다른 끝에서 전혀 만나리라 예상치 못한 시간 속을 걸어왔던 서로 다른 영혼들이 만나 서로에게 허락된 시간 만큼을 누리는 존재의 기쁨이 함께하고 있었다.
도서관 한 켠 벽면엔 지역 아티스트들의 작품 전시회가 종종 열린다. 아티스트의 명함과 팜플렛, 방명록이 가지런히 놓인 작은 전시회. 어느 날 푸른 눈의 그녀가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함께 작품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해 왔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아닌 지역 아이들의 작품부터 유화, 입체 종이 아트, 포토그래피 등 소소하지만 잔잔한 전시회를 함께 보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이국 땅에서 만나는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함엔 우리의 전시 관람이 사뭇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품에 다다르기까지 그녀는 작품을 보지 않고, 작품 앞에 다가섰을 땐 눈을 감고 작품에 대한 표현을 듣는다. 오직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작품을 보고 뇌리에 작품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은 영어 표현을 개발하기 위한 배움을 위한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보이지 않는 그림을 어떻게 설명해 나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이한 작품을 연상하게 되기에 세심한 관찰과 다방면의 접근이 필요했다. 작품 전체의 구도, 빛의 방향, 색감과 명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사물, 그들의 동작과 동선의 움직임, 그림자와 각도 그리고 작품에서 느껴지는 느낌들까지. 하나의 작품을 나누기까지 그녀는 인내하며 듣는다. 듣고 이미지를 그리고 다시 묻거나 듣는다. 니체가 우상의 황혼에서 거론했던 교육자의 도움이 필요한 세가지 중 첫번째가 바로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던가. 니체는 눈을 통해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깊고 사색적인 주의의 능력, 즉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눈을 감고 기다리며 나는 보는 법을 익힌다. 그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녀와 함께하는 전시회는 내게 보는 법을 배우게 한다. 일어나 보이는 모든 일을 그저 외부의 자극에 내맡긴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사색적 삶을 통한 주체적인 나를 깨운다. 그날의 전시회는 바이올린, 첼로 등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 모습이 유화로 담겨 있었고, 나는 그 중 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세 작품이 세로로 나란히 전시된 곳에 멈춰 그림을 이야기 했다. 오직 듣는 것만으로 그림을 뇌리에 그릴 수 있도록.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의 제목은 ‘마에스트라(maestra)’. 양팔을 모아 두 손을 들고 각각 연주자들의 호흡을 이끌고 화음을 만들어 내던 지휘자의 손길, 음악이 강하게 휘몰아치다 잦아들며 여려지더니 지휘자의 손끝 하나에 공중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그렇게 마에스트라의 손끝과 양팔의 품 안에서 음은 살아나고 가슴으로 들어와 공명하며 사라져갔다.
마에스트라는 일반적으로 남성 지휘자를 일컫는 마에스트로의 여성형이다. 빈 필하모닉 등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오랫동안 여성연주자와 지휘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전시회 연작에 ‘마에스트라’를 명명하며, 전시회 전체의 연주가 여성 지휘자에 의해 공연되었음을 이야기했다.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그녀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보듯이. 그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조화로운 하모니의 연주회였다.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이 연주회를 우리는 듣는다. 니체가 이야기 했듯, 멈춰서 보는 법을 배우고, 듣는 다면 훨씬 더 선명하게 들려올 것이다. 각자의 삶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또는 마에스트라가 되어. 조화로운 화음을 위해 오늘 낮춰야 할 음과 높여야 할 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 안의 악기 중 조율이 필요한 악기가 무엇인지도 들려올 것이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작품을 보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았던 마에스트라의 연주를 그녀는 눈으로 보며 이야기한다. 그곳엔 그녀와 내가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연주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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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한문협 회원 김소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