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중산층의 ‘가오’

2019-07-10 (수) 남상욱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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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2015년 개봉한 영화 ‘베테랑’의 주인공인 서도철(황정민 분) 형사가 동료 형사에게 건넨 영화 속 대사다. 당시 영화 ‘베테랑’은 천만관객을 돌파하면서 이 대사 역시 한국 영화사에 남을 명대사로 우리 기억 속에 있다.

‘얼굴’을 뜻하는 일본어 ‘카오(顔)’에서 유래했다는 ‘가오’는 있는 척 ‘허세’를 부린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서도철 형사가 말한 ‘가오’는 일종의 자존심을 뜻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월급이라는 계수적, 객관적 기준으로 보면 그저그런 직업인 형사, 사회적 호감도 역시 낮은 직업인 형사. 하지만 범법자를 잡아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속성으로 보자면 직업적 자존심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말 속에 담겨 있다.


서도철 형사는 ‘가오’라는 말로 월급 숫자로는 나타낼 수 없는 형사의 자존심을 그대로 표현한 셈이다.

미국에서도 서도철 형사의 ‘가오’가 나타난 곳이 있다. 바로 미국 중산층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가치를 숫자와 돈으로 규정짓는 것이 특징이듯이 사회 계층을 분류할 때도 수입이 기준이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미국을 지탱하고 있다는 중산층을 가리는 기준이 수입 기준에서 속성 기준으로 변하고 있다.

‘어센트’(The Ascent)가 미국 성인 1,011명을 대상으로 중산층의 속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 미국인들은 매월 받아 드는 ‘각종 청구서를 제때 갚을 수 있는 것’이 중산층의 첫 번째(83.9%) 속성으로 꼽았고, 두 번째로 ‘안정된 직업’(80.3%)이었다. 이어 저축 여력이 63.7%, 경제적, 시간적 여유 51.2%, 최소 1,000달러 저축액 보유가 42.8%로 중산층 속성으로 각각 꼽혔다.

5만2,187달러. 연구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제시한 4인 가족 연소득으로 중산층을 가르는 기준이다. 천정부지 렌트비와 의료비를 감안하면 소위 중산층의 안락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숫자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속성은 수입이 얼마나 되는가에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낼 것 내고 갚을 것 갚는 평범한 재정적인 안정감의 유무에 달렸다.

현실의 삶이 예전만큼 녹록하지 않은 것이 일상이 돼버린 미국 중산층이 보여줄 수 있는 자존심이 재정적인 안정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도철 형사의 ‘가오’와 닮은꼴이다.

미국 중산층의 ‘가오’는 소득 양극화 현상이 극심해지면서 ‘미국의 꿈’이면서 미국을 지탱해 온 중산층이 해체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자, 더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며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에 다른 말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서도철 형사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상욱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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